[취재일기] 한·일 정치인이 꼭 들어야할 연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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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서승욱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 총리가 격노했다.”

일본 TV아사히의 14일 낮 뉴스에 출연한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後藤謙次)가 전한 일본 총리관저의 분위기다. 한국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조치를 인정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최종 판정에 아베 총리가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고토는 “수많은 갈등 현안을 안고 있는 한국과의 싸움에서, 그것도 국제기관이란 무대에서 졌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징용 문제와 관련해 한국을 국제사법기구에 제소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라고도 덧붙였다.

아베 총리의 심기는 일본 언론 보도에 곧바로 반영됐다.

“아베 총리가 6월말 오사카 G20(주요 20개국)정상회의때 문재인 대통령과의 개별 회담을 보류하는 방향으로 검토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사엔 “빈손으로 오는 문 대통령과 만날 의미가 없다”는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의 자극적인 발언도 인용됐다.

5월16일 도쿄에서 열리는 이경미(왼쪽)와 무라지 가오리 공연 포스터. [사진 히라사오피스]

5월16일 도쿄에서 열리는 이경미(왼쪽)와 무라지 가오리 공연 포스터. [사진 히라사오피스]

‘한·일 관계=대결’이라는 아베 총리의 시각은 고토의 해설과 일본 언론의 보도에서 실감 나게 드러났다. 하지만 아베 총리와는 180도 다른 방향에서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처음부터 기타와 피아노의 앙상블을 위해 쓰인 곡은 없어요. 편곡으로 함께 연주할 곡을 만들고, 또 상대방의 소리를 잘 들으며 내 소리를 맞추는 것이죠. 언제나 자기의 소리보다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줍니다. 그래야 부드럽고 절묘한 음색이 만들어지거든요. 한·일 관계도 그런 배려가 필요합니다.”

다음달 16일 일본의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村治佳織)와 도쿄에서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가 지난주 본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25년 전 음악축제가 열리던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이경미와 무라지, 2009년과 2012년 3년 간격으로 두 사람을 찾아온 암과 함께 맞서 싸우며 서로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나이 들기 전에 추억을 더 만들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이번 공연은 처음엔 11월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나서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음악이 역할을 해달라”는 지인들의 권유로 일정을 당겼다.

“정치인들도 나보다 상대방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으면 좋겠다”는 이경미의 바람은 일본 정부만 아니라 한국 정부에도 해당될 수 있다.

“전쟁 주범의 아들인 일왕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문희상 국회의장 발언을 놓고 지난 2월 양국 외교장관이 벌인 진실 게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독일 뮌헨에서 열린 외교장관 회담에서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은 박태준 전 총리 등 과거 지일파 정치인들을 화제에 올렸다. 일본을 배려했던 과거 정치인들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문 의장 발언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표출했는데 한국 측에선 “문 의장 관련 언급이 없었다”는 반응이 주로 나오며 한·일이 서로 다른 얘기를 반복했다. 결국 양국 장관들 간의 진실 공방으로 번지며 갈등만 커졌다.

양국 관계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열리는 다음 달 두 사람의 공연엔 양국의 주요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한다. 불가능할 것 같던 기타와 피아노 앙상블을 완성하기 위해 서로를 배려해온 두 사람의 모습이 양국 정치인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이 됐으면 좋겠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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