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특권 의식 만연 탈법에도 태연|"내가 누군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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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공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3월22일 오전 충북 보은 군청에서는 한 토막 해프닝이 연출됐다.
보은 군청 초도 순시에 나선 H지방 병무청장이 군청에 도착하자마자 병무 행정 보고도 듣지 않은 채 현관에서 그대로 발길을 되돌리고 만 것이다.
당초 H청장의 군청 도착 예정 시간은 이날 오전 10시30분. 그러나 H청장이 예정보다 30분 이른 오전 10시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군청 현관에는 미처 그를 영접 나온 직원이 한사람도 없어 빚어진 촌극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군수가 『도착 시간이 앞당겨져 빚어진 결례』라며 백배 사죄, 겨우 웃분의 노여움 (?)을 풀 수 있었다.
이보다 한달여 앞선 2월12일 부산 환경지청 현관 앞. 보은 군청과는 대조적으로 60여명의 전직원이 정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길목에 3열 횡대로 죽 늘어서 벌써 30여분 동안이나 영하의 추위 속에 떨고 있다. 직원들은 이날 연두 순시를 오는 박모 환경청장을 영접하기 위해 일찍부터 동원돼 있었던 것이다.

<전직원 동원해 영접>
「권위주의 청산」이 관가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시대적인 구호가 됐던 지난해 초 6공 출발을 전후해 일어난 이 두 해프닝은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와 특권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편린들이다.
S대 M교수는 지난해 여름 휴가 때 지리산에서 본 어떤 「원님」의 행차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씁쓸해 한다.
엄연히 「제차 통행 금지」 팻말이 나붙은 화엄사∼노고단간 비포장 도로를 로열 승용차를 앞세운 검은색 슈퍼 살롱 승용차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메워 오르내리는 등산객 틈을 비집고 정상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M교수의 확인 결과 「원님」 행차의 주인공은 앞차는 구례 군수, 뒷차는 전 건설부장관 K씨.
『처음에는 업무 관계로 상급자를 모시고 갈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이날 노고단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없는 데다 승용차 속에 여자가 동승한 것을 보고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고 M교수는 말한다
이처럼 일부 계층의 그릇된 특권 의식은 스스로를 「내가 누군데」하는 교만감에 빠져들게 할뿐 아니라 「남이 하지 못한 일을 나만이 해낸다」는 자기 과시욕에 차있고 보통 이상의 대우를 기대하며 또한 이를 당연시한다.
최근 경남 김해의 가야 컨트리클럽 골프 회원권을 특혜 분양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사건도 부산 지방 해운항만청장 H씨, 전 국회의원 Y씨, 전 치안 본부장 L씨 등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그들의 몸에 밴 특권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해 탈법행위에까지 서슴없이 가담한 경우로 지목되고 있다.
사회 구석구석 퍼져 이같이 「내가 누군데」 같은 특권 의식은 일부 공직자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부유층이나 특정 신분층 등 일반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넓고 깊게 퍼져 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보통 사람」임을 거부하며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남보다 유리한 위치나 지위에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발판으로 보통 사람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으려고 안간힘이다.
최근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고려대·한림대 등 일부 대학의 교직원 자녀 부정 입학 사건도 같은 맥락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내가 누군데」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새벽잠을 설치며 줄을 서 추석·구정 귀성 열차표를 살 때도 미적거리다가 출발 시간 임박해서야 기민성을 발휘, 차표를 구하려들고 민원 창구에서도 급행을 요구한다.
충주 수안보 Y관광 호텔 예약부 임은정 양 (24)은 『신정 연휴 등 성수기철 이미 객실 예약이 끝났는데도 관청이나 특정 기관 소속 신분을 밝히며 반 위협적으로 방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아 속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고 실토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호텔은 아예 3∼5개씩의 비상용 방을 비워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권 의식이 빚은 가장 큰 병폐중의 하나는 이처럼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정당한 절차와 과정이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민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게 할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기틀을 흐트러뜨릴 수도 있다.
최근 퇴역장성·의사·기업체 대표 등이 그린벨트를 훼손, 불법 건축을 했다가 감사원에 적발된 사건은 특권 의식이 하루빨리 치유되어야할 우리 사회의 고질병임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치유 시급한 고질병>
이들은 전원 주택을 이전 개축하면서 3백∼8백평씩의 인근 임야·농지를 무단 형질 변경, 정원으로 꾸몄다. 심지어 기업체 사장 윤모씨 (42)는 북한산 국립공원 6백여평에 정원과 사도 등을 꾸며 아예 자기 땅인 것처럼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
보통 사람 이상의 대우나 특혜를 바라던 특권 의식이 이제는 탈법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태연해 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중증의 고질을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서민들이 그린벨트 안에 있는 변소문짝 하나만 뜯어고치려 해도 그렇게 꼬치꼬치 법조문을 따지고 통제가 심하던 공무원들이 왜 그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한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과천시 과천동의 한 주민은 바로 그같은 공무원의 자세가 일부 계층에 특권 의식을 심어주고 탈법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라고 꼬집는다.
지난달 7일 오후 서울 정동 정동교회 앞 네거리. 평소 교통 경찰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 이날 따라 관할 남대문 경찰서 교통 계장을 비롯, 한꺼번에 6명의 교통 경찰이 몰려나와 교통 정리를 벌이는 바람에 행인들이 의아심에 걸음을 멈칫거리다 이내 그 이유를 알고서는 쓴웃음을 짓고 돌아서고 말았다.
네거리 앞 교회에서는 때마침 국내 굴지의 D그룹 총수 조카 결혼식이 열렸던 것.
특권 의식은 보통 그릇된 권위나 신분을 앞세워 그것을 누리려는 사람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 속성이다.
그러나 특정인의 결혼식장 앞에 늘어선 교통 경찰들이나 그린벨트 훼손을 눈감아준 공무원처럼 그릇된 권위에 맹종·아부하고 필요 이상으로 대우해 주려는 비뚤어진 사회 분위기와 의식이 또 하나의 특권 의식을 부추기고 심어주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고 있음도 간파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인간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건만 이같이 비민주적 작태들은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펼쳐지고 있다.
『특권 의식이 낳은 폐해는 그 행위의 결과가 자신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국민들에게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가져와 사회 계층간의 위화감을 심어주고 사회 기본 질서를 흐리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창산 되어야 한다』는 이대 김대환 교수(사회학)의 진단이다. <정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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