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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집에서 몰래 바람 피운 리스트, 상대 여인은 바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9)

리스트. 21세의 모습. Achille Deveria. 석판화. 1832.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리스트. 21세의 모습. Achille Deveria. 석판화. 1832.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여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리스트와 쇼팽은 한 살 차이였고 동시대의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서로 존경하고 있었다. 음악계에서 발이 넓었던 리스트는 그가 아는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쇼팽을 소개해 주어, 그가 파리에서 이른 시일 안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음악계에서 적절한 위상을 확보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쇼팽이 한동안 파리를 비운 사이 그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틀어지게 된다. 쇼팽은 파리에 와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귀족들의 부인과 딸들에게 레슨을 해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이름도 좀 알려지자, 쇼세 당탱(Chaussée d’Antin)거리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지역은 쇼팽의 주 고객들인 신흥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 지역이었다.

어느 날 쇼팽이 파리를 잠시 떠나있을 일이 생겼다. 쇼팽의 여행 계획을 들은 리스트는 그에게 열쇠를 맡기고 가라고 요청했다. 빈 아파트를 자신이 돌봐주기도 하고 때로 잠시 쉬기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쇼팽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쇼팽은 리스트가 그의 아파트에서 벌인 행각을 알고 경악하였다. 리스트가 당시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 마리 플레옐(Marie Pleyel, 1811~1875)을 쇼팽의 아파트로 끌어들여 정분을 나눈 것이었다.

마리 플레옐. 당대의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Josef Kriehuber. 석판화.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리 플레옐. 당대의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Josef Kriehuber. 석판화.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리는 쇼팽의 절친으로 악보 출판업자이며 피아노 제작자인 까미유 플레옐(Camille Pleyel)의 아내였다. 그녀는 예쁘고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쇼팽 또한 그녀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쇼팽은 플레옐 부부와 가깝게 지냈고 자신의 녹턴 1~3번을 마리에게 헌정하기도 했었다. 그중 2번째 곡 작품번호 9-2는 쇼팽의 녹턴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리스트는 당시 비밀 연애 중이었던 그 시대 파리 사교계의 꽃,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을 따돌려야 했고, 마리 플레옐의 입장에서도 남편의 눈을 피해야 했으므로 둘은 비밀스러운 장소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비어있는 과묵하고 순진한 쇼팽의 아파트는 그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쇼팽은 이를 매우 역겹게 생각했다. 그는 파리로 온 후 순결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고 성을 죄악시하고 있었다. 더 난처했던 것은 이 소문이 퍼져나갔을 때 친구 까미유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자기 부인을 리스트가 유혹하는데 쇼팽이 도와주었다고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도를 넘은 리스트의 행동에 쇼팽은 분개했고 이 사건 이후 쇼팽은 리스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 시대에 가장 관객 동원력이 컸고, 특히 당시 음악의 주 고객이었던 부인네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리스트이었기에 그에게는 추문이 항상 따라 다녔다. 그런데 마리 플레옐도 주체할 수 없는 끼로 많은 남자의 구애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단정하기는 힘들었다. 마리에 대해서는 환상 교향곡의 작곡가 베를리오즈와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마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속옷가게를 하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인 그녀는 8세에 첫 연주회를 가졌고, 15세에는 이미 뛰어난 테크닉을 갖춘 일류 피아니스트가 되어있었다. 마리는 집의 생계도 도울 겸 개인 레슨도 했고, 18세에는 이미 파리의 한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 가던 어머니는 어린 티를 벗은 재능 있고 예쁜 딸의 상품 가치를 높게 보고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학교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동갑내기 페르디난트 힐러가 예쁜 마리에게 빠져 그녀를 유혹했고 마리도 이에 응해서 둘은 이미 마리의 어머니 몰래 연애를 하고 있었다. 이때 늦은 나이에 음악공부를 하여 그 학교에서 기타 선생으로 재직하던 베를리오즈가 나타나는데, 힐러는 베를리오즈를 통해 마리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베를리오즈. 판화. 작가 시기 미상.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베를리오즈. 판화. 작가 시기 미상.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러자 도리어 순진한 로맨티스트인 베를리오즈가 19세의 ‘미칠 듯이 예쁜’ 마리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그의 구애에 당돌한 마리는 살짝 마음을 열어주었는데 베를리오즈는 한 번의 연애로 그녀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생각하고는 마리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딸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였으므로 어머니는 그 청을 즉각 거절하였다. 얼마 후 반전이 일어났다. 프랑스 정부가 유망한 젊은 음악가에게 수여하는 ‘로마 대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베를리오즈는 5년 동안 3000프랑의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생이 되어서 형편이 나아진 것이었다. 다시 그는 마리의 어머니를 찾아갔고 마리의 어머니는 마지못해 두 사람의 약혼을 허락하였다.

의사 아버지의 반대로 어렵게 음악을 공부하던 베를리오즈였기에 4번의 도전 끝에 수상한 로마 대상은 큰 성취였다. 그 상으로 자신의 음악 경력을 빛낼 기회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5년 동안 경제적 여유도 생겼고 이에 더하여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생겼으니 지중해 빛 하늘 아래의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그의 마음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그가 로마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마리를 눈여겨보고 있던 까미유 플레옐이 마리의 어머니를 찾아오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까미유는 나이는 마리보다 23살이 많았지만 프랑스 제일의 피아노 제작자이면서 음악 출판업자로 돈이 많았다.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는 멋진 신사의 방문을 받은 모녀는 청혼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곧 약혼이 발표되었다. 마리 어머니의 편지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베를리오즈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두 여인과 한 남자(마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플레옐)’를 죽이고 자신은 자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어야 했기에 베를리오즈는 하녀로 변장하기로 했다. 완벽한 하녀 복장을 한 벌 훔친 그는 총신이 두 개 달린 총과 독약을 마련했다.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향하던 그는,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 도시 제노아에서 마차를 바꿔 타던 중 변장할 옷이 든 가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의 쇼셰 당탱 거리. 쇼팽은 파리에서 안정을 찾자 당시 고급 거주지였던 이 거리로 거처를 옮겼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오늘날의 쇼셰 당탱 거리. 쇼팽은 파리에서 안정을 찾자 당시 고급 거주지였던 이 거리로 거처를 옮겼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경찰의 눈에 그는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한 여행객이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그 가방 안에는 그 남자가 입을 하녀 옷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허겁지겁 다시 하녀 옷을 장만하려 하고 있었다.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소란스럽던 유럽에서 총기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니 경찰로서는 프랑스로 가려는 수상한 여행객의 여행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줄 수가 없었다.

베를리오즈는 방향을 바꾸어 니스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가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니스에서도 그의 여행은 계속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몇 주가 지나도록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러는 사이에 베를리오즈는 정신을 차렸고 불같은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는 멀리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한편 여러 남자와의 잇따른 부정행위로 온 파리가 마리에 대해 뒷담화를 늘어놓는 가운데 까미유 플레옐은 마리와 이혼을 신청했다. 까미유가 법원에 제기한 이혼 사유는 배우자의 ‘무절제한 행동거지와 지속적인 부정’이었다. 이혼 후 마리는,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여 음악계에 실력을 떨쳤고, 여자 리스트로 불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48년 이후로는 브뤼셀의 음악원에서 오랫동안 피아노를 가르쳤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끊임없이 비교되었고 서로 간에 사랑과 증오가 교차했던 리스트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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