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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문예-학술 교류 "전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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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이후 문화·예술계와 학계에서는 각종 남북 교류 제의와 선언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기만 단 한건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7·7선언을 뒷받침하고 남북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정부가 추진키로 했던 「남·북한 교류에 관한 특별법」 (가칭) 제정 등 법적·제도적 후속조치가 마련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민족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한다는 7·7선언의 정신은 북한을 반 국가 단체로 간주하고 북한 방문을 잠입·탈출로 규정하는 국가 보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그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은 처음부터 지적되어 왔다.
7·7선언이 발표 된지 20일도 채 안된 지난해 7월25일 전봉초 예총 회장은 재독 음악가 윤이유씨가 제의한 남북 합동 민족 음악 축제를 그해 10월말 판문점에서 열기로 합의했다(북한측은 이미 수락).
이어 8월12일 민족 미술 협의회 (대표 김정헌)는 범 민족 미술 대전을 제의했다.
한국 미협 (당시 회장 하종현)은 8월24일 남북 미술 교류 기구의 창설 등 5개항의 「올림픽 이후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위한 제안」을 발표했다. 같은 달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회장 전숙희)도 서울 국제 펜 대회에서 남북 문학 작품 교류 및 북한 문학의 개방과 북한 펜의 설립을 촉구했다.
11월2일에는 북한의 사회과학원과 미국의 스탠퍼드대 국제 전략 연구소가 학술 교류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북한·미국간에 처음으로 공식 교류 관계가 성립했다.
올해 1월11일에는 북한이 임효재 (서울대 박물관장)·이광규 (서울대 인류학)·김광언 (인하대 민속학)·김병모 (한양대 고고학)·안휘준 (서울대 미술사) 교수 등 10)여명의 학자를 5월중에 초청할 의사를 재미학자 「피터·현」씨 (하와이대)를 통해 전달해왔다.
같은 달 24일 한국 생약 학회 (회장 이인란·이대 교수)는 5월2, 3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심포지엄에 북한 생약 학자 3명을 초청했다고 발표했다. 생약 학회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초청장을 발송했다.
2월에는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고영근(서울대 국문)·임형택 (성균관대 국문)·안병욱 (성심여대 한국사) 교수와 시인 고은씨·김언호씨 (한길사 대표) 등 6인이 『사회와 사상』지에 공개 서한 형식의 기고를 통해 관련 분야의 남북 교류를 제의했다.
한국 정치 학회 (회장 한흥수)도 이 무렵 7월24일부터 2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 회의에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정치학자와 국사학자를 1명씩 초청할 계획임을 밝혔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한국 소설가 협회 (회장 김동리)는 남·북한 소설가 교류 및 남북 소설가 회의 개최를 선언했다.
민족 문학 작가 회의도 3월4일 북한의 조선 작가 동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 서한을 발표, 남북 작가 회담을 위한 예비 회담을 3월27일께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5월24일에는 북한의 원로 사학자 전영률·김석형·박시형이 공개 서한 형식으로 남북 역사 학자 회담을 제의했으며 이에 대한 우리 학계의 수정 제의는 관계 당국에 의해 대북 전달 여부가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올 들어 정주영씨·문익환 목사의 잇단 방북에 따른 부작용을 중시, 7·7선언 정신에 따른 남북 교류 방침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윤이유 음악 전집 국내 수입 불허 (2월24일), 남북 작가회의 예비 회담 불허 (3월24일), 임효재·이광규 교수 등에 대한 북한 초청 문제 보류 조치가 「대표성 결여」「일원화된 창구 부재」등의 이유로 취해졌다.
문공부는 3월27일 다양하게 제기되는 단체간의 임의 교류 움직임을 정리하기 위해 남북 문화 예술 교류 자문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후인 3월29일 각계 인사 80여명이 민간 차원의 남북 문화 교류를 위해 「남북 문화 교류 협의회」를 발족시킴으로써 급기야는 대립 양상으로까지 발전했다.
이후 정부의 방침은 경화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남북 교류 방침은 법적·제도적 정치가 정비될 때까지 당분간 유보」「정부 승인 없는 북한 접촉은 처벌」 「국가 보안법의 현행 골격 유지」 등의 언급이 그것이다.
정부는 6월 들어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늦어짐에 따라 행정 지침 형식의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기본 지침」을 확정했다.
이 지침은 남북 주민간 상호 방문은 남북 교류 협력 추진 위원회 (위원장 이홍구 통일원 장관)의 심의를 거쳐 통일원장관의 승인을 받고, 남북간 협력 사업은 주무부처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같은 남북 교류에 관한 정부 방침의 전면 후퇴에 대해 양성철 교수 (경희대 정치학)는 『7·7선언은 사전 정지 작업 없이 발표됨으로써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고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국내 갈등을 무마, 지연시키려는 호도책으로 오해받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이정복 교수 (서울대 정치학)는 『7·7선언은 사회 각계층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고 법개정과 국민 계몽이 선행되지 못한 채 국내 정치적 효과를 위해 나옴으로써 상당한 혼란을 유발시켰다』고 비판하고 『정부는 장기적이고 명확한 교류 원칙을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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