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남방을 생각하고, 눈 돌리며, 가야 할 시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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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

세계가 급변하고 있다. 국제적 가치와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이 자국중심주의 정책을 쏟아내면서 그 여파가 지구촌에 퍼지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92년 『역사의 종언』을 통해 냉전 종식 이후 세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수렴되는 지루한 역사가 계속될 것으로 예견한 지 27년이 지났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 민주주의 가치와 동맹에 기반을 둔 외교, 자유무역주의가 크게 도전받는 양상이다.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외교 #아세안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

기존의 어떤 질서도 삼켜 버릴 것 같은 문명사적 변화의 파도 앞에서 대한민국 외교도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도 근본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수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를 조짐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한국 외교 지평의 확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과 인도를 한국의 주요 외교 전략 지도에 포함하는 ‘신 남방정책’이 나온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다. 올해가 한·아세안 대화 관계를 시작한 지 30주년이다. 1989년 당시 82억 달러였던 쌍방 교역액이 2018년엔 1600억 달러로 늘어나 아세안은 이제 중국에 이어 제2의 교역 상대가 됐다.

아세안은 미국·유럽연합(EU)에 이은 3대 투자대상 지역이다.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더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아세안 국가를 찾은 한국인은 900만명, 한국을 찾은 아세안 국가 국민은 240만명이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아세안 국민은 60만명, 아세안에 거주하는 한국인도 30만명에 이른다.

아세안에선 한국의 최고 소프트 파워인 한류가 뿌리내려 생활의 일부가 됐고, 한국에선 동남아 음식 붐이 일고 있다. 경제적·문화적·정서적으로 서로를 흡인하는 강력한 자산들이 쌓여 가고 있다.

아세안은 열강의 주도권 경쟁이 첨예하게 맞붙은 지역이기도 하다. 미국·중국·일본 등이 이 지역에서 전개하는 전방위적 외교전은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더 복잡한 양상을 띠어 갈 것이다. 한국은 강대국들보다 경제력·군사력 등에서 현저히 열세에 있어 그들처럼 아세안을 상대로 물량 공세적, 강압적 외교를 추진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력이라는 하드 파워가 개입되지 않는 한·아세안 관계는 지속할 수 있고 우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오는 11월 25~26일 부산에서 한·아세안 관계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정상회의가 열린다. 27일에는 메콩강 유역 국가인 베트남·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와 한·메콩 정상회의도 처음 개최된다. 2009년의 10주년, 2014년의 25주년 정상회의에 이어 이번 30주년에 아세안 10개국 정상 모두가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그만큼 아세안이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의미다. 지난 30년간의 경이로운 관계 발전을 함께 축하하고 미래 30년을 향한 비전과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 생산적이고 우의에 가득 찬 회담이 되길 바란다.

한국과 아세안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2009년 설립된 국제기구인 한·아세안 센터도 아세안 주간(ASEAN WEEK), 아세안 열차(ASEAN TRAIN) 등의 행사를 통해 우리 국민이 아세안을 더 잘 이해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제는 우리가 남방을 생각하고, 남방으로 눈을 돌리며, 남방으로 가야 할(Think, Look and Go South) 시대다. 아세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외세의 지배라는 아픈 역사와 동아시아적 문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열정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아세안이 손잡으면 평화·번영을 함께 이룰 수 있다. 강소국 한국이 가진 모든 역량이 빛을 발하고 큰 결실을 볼 수 있는 지역은 아세안이다.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