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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죄인은 최후에…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쾌한 단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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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2) 

우리는 모두 ‘페르소나’를 쓴 이중적 인격의 소유자이다. 현대 사회가 설정한 패러다임에서는 누구나 가식적 가면을 하나씩 지닌 채로 본연의 나를 감추고 살아간다. 등장인물의 인간관계라는 드라마 속에서 빈틈없는 논리 전개와 극적인 반전을 구사해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인간의 민낯을 들춰내는 대표적 추리 소설 작품을 원어 표현과 함께 읽어보자. <편집자>

최근 뉴트로(new + retrospective)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10~20대 때 즐겨 입던 옷, 신던 신발, 먹던 과자류에 향수를 느낀 40~50대 중장년층이 ‘복고풍’을 일으키며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편의점에선 ‘추억의 도시락’이 매장에 등장했다고 한다. 사각형의 노란 양철 상자에 담긴 도시락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다. 젊은 세대도 부모 세대의 영향으로 복고 열풍에 합류하고 있다고 하니, 바야흐로 복고풍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30여 년 세월을 무색게 하는 스릴

요즈음 20대 때 즐겨 읽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셜록 홈즈로 익히 알려진 코난 도일과 함께 추리 소설의 원조라 일컬어지는 그녀의 100여 편에 이르는 주옥같은 작품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긴장감이 넘쳐 30여 년의 세월을 무색게 하는 스릴을 느끼게 한다.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성이 퇴색하지 않는 이유다.

서재에서 우연히 빼 든 책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원제 And then there were none).』는 영국 폰타나 출판사에서 간행한 문고판 페이퍼백이다. 색이 바랜 책표지를 넘기니 ‘1st Reading 1988년 6월 12일’이라고 적혀 있다. 책을 다 읽으면 읽은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의 기록이다. “야, 31년 전에 읽었네, 세월이 참으로 빠르구나.”

서재에서 우연히 빼 든 책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표지. [사진 이광현]

서재에서 우연히 빼 든 책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표지. [사진 이광현]

이 작품은 ‘열 개의 꼬마 인디언 인형’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연극으로도 상연된 적이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치밀한 작품구성, 탄탄한 배경설정, 짜임새 있는 논리전개가 단연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줄거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 무대는 영국의 외딴 니거 섬(Nigger Island)이다. 오웬(U.N. Owen) 이란 생면부지의 인물로부터 남녀 열 명이 이 섬으로 초대된다. 전직 판사부터 비서, 군인, 의사까지 사회 각계 각층 출신들이 ‘죽어 마땅한’ 죄목을 저마다 하나씩 감춘 채 ‘페르소나’의 가면을 쓰고 있다.

도착 첫날, 각자의 방을 배정받아 맛있는 저녁 식사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Everyone was in better spirits). 베라가 말한다. “내 방에는 열 개의 꼬마 인디언 인형 동요 가사가 적힌 액자가 벽에 걸려 있어요.”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말한다. “내 방에도.”

시곗바늘이 밤 9시 20분을 가리키는 순간(The hands of the clock pointed to twenty minutes past nine), 어디선가 잔혹하고(inhuman),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penetrating)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있는 여러분 각자는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열 명 각자의 살인 죄목이 하나씩 낭독되고, 마침내 목소리가 멈춘다. 공포에 질린 정적(petrified silence)이 흐르고, 갑자기 ‘쨍그랑’ 커피잔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방 밖에서는 비명이 들려오고….

로저스 부인이 쓰러져 있다. “브랜디를 좀 가져다주세요.” “여보, 정신 차려( Pull yourself together).” 맥아더 장군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한다. “이건 모두가 터무니없는 일이야(The whole thing is preposterous).” “도대체 오웬이란 작자는 누구야.” 오웬은 U.N( Unknown) 이니셜이 암시해 주듯 말 그대로 ‘미지의 인물’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설정이다.

“우리를 이곳으로 유인한 자가 누구이든 간에(Whoever it was who enticed us here), 그자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거나, 알려고 엄청난 대가를 치른 작자야. 엉뚱한 생각(a bee in his bonnet)을 가진 미친 자란 말이야.”

등장인물이 한 명씩 살해될 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쓰러진다. 사진은 1954년 제작된 영화 &#39;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9;의 한 장면. [사진 해당 영화 캡쳐]

등장인물이 한 명씩 살해될 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하나씩 쓰러진다. 사진은 1954년 제작된 영화 &#39;그리고 아무도 없었다&#39;의 한 장면. [사진 해당 영화 캡쳐]

어쨌든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열 명은 열 개의 꼬마 인디언 인형 동요 가사 내용에 따라 차례차례 살해당한다. 한 명씩 살해될 때마다 인디언 인형이 동시에 하나씩 쓰러지는 공포감과 달아날 곳이 없는 폐쇄된 공간, 누가 살인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미스터리의 숨 막히는 전개가 극도의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마침내 롤러코스터는 종착역에 도착하고…. ‘법이 다스릴 수 없는 범죄들을 U.N.오웬이 처벌했다(U.N.Owen dealt with cases that the law couldn't touch).’

한치의 에누리 없이 내려진 정의의 심판

죗값의 경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울대에서 가려진다. ‘죄질이 가벼운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해, 그래야 더 냉혹했던 자들이 더욱더 오래 겪어야 할 정신적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테니까 (Those whose guilt was the lightest should pass out first, and not suffer the prolonged mental strain and fear that the more cold-blooded offenders were to suffer).’ 폐부를 찌르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쾌한 결론이다. 과연 미스터리 여왕답다.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뉴스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온다.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분명히 있을 터인데 ‘내로남불’ ‘'가짜 뉴스’'등의 연막을 치고 진실을 왜곡시켜 국민을 어리둥절케 한다. 한 치의 에누리 없이 공평하게 ‘정의의 심판’을 집행하는 미지의 인물 U.N.오웬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광현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khlee60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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