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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덜어내고 악의를 정화해주는 이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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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31)

나와 동생은 살아있을 때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이 떠나고 나니 미안하고, 가슴에 맺힌 기억이 새로워 동생을 자주 찾게 된다. 사진은 용미리 묘지에 방문한 추모객의 모습. [중앙포토]

나와 동생은 살아있을 때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이 떠나고 나니 미안하고, 가슴에 맺힌 기억이 새로워 동생을 자주 찾게 된다. 사진은 용미리 묘지에 방문한 추모객의 모습. [중앙포토]

한 달에 한 번 납골당에 간다.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그곳엔, 2년 전 앞서간 동생이 잠들어 있다. 살아생전엔 그리 도타운 사이가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땐 이런저런 이유로 부딪치기 일쑤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성격이며 하는 일도 영 달라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을 제외하고는 띄엄띄엄 만나는 사이였다.

그래도 못 보게 되니 미안하고, 가슴에 맺힌 기억만 새롭다. 세상을 떠난 해에는 매주 한 번 찾다가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찾는 것도 그런 마음이 작용해서다. 찾아가야 별 의미가 없다는 건 머리로 인정한다. 그저 영정에 대고 못 본 새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창밖의 하늘 한 번 보는 게 고작이다.

그리고는 장묘공원을 잠깐 둘러본다. 꽤 깔끔하게 꾸며진 그곳엔 눈에 띄는 서비스가 있다. 조문객들이 휴대전화로 납골당에 고인을 기리는 메시지를 보내면 그걸 장묘공원 내에 설치된 디지털 게시판 올려준다. 어쩌다 시간이 날 때면 조문객들이 저마다 남긴 메시지가 흘러가는 게시판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자식을, 부모를 그리워하는 절절하고도 진솔한 그 메시지들을 읽다 보면 한낮이라도 주변의 기척이 사라지고 고요한 시간이 찾아든다. 내가 떠난 후 나는 누구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쓸쓸한 심정과 함께 착한 심사가 되는 것이다.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듯,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말은 모두 착하다는데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 역시 울림이 크다.

『눈물의 편지』,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 지음, 이진경 그림. 앞서 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를 엮어 만들었다.

『눈물의 편지』,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 지음, 이진경 그림. 앞서 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를 엮어 만들었다.

『눈물의 편지』(고인을 기리는 사람들 글, 이진경 그림, 넥서스)란 책이 있다. 2000년에 나왔으니 좀 묵은 책이고, 실제 인터넷서점 등에서 구하기 쉽지는 않다. 그런데 세상이 원망스럽거나 독한 마음이 들 때, 미운 사람이 있거나 사는 게 버거울 때 이 책을 꼭 펼쳐 보기를 권한다. 제목이 의아한 이도 있겠지만, 책을 엮은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에서 짐작하듯 책에 실린 편지 역시 한 사람이 쓴 글이 아니다. 추모 글을 엮은 책이다. 앞서 이야기한 디지털 추모 게시판의 활자판이라 보면 된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장묘사업소가 1999년 벽제리, 용미리 등의 납골 시설 다섯 곳에 ‘고인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트를 비치해두고 조문객, 유족들이 망자에게 띄우는 글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3000여 통 중의 193통을 그림과 함께 묶은 것이 이 책이다. 결코 답장을 받지 못할 이 편지들은, 전문적으로 글 쓰는 이들의 ‘작품’도 아니고 남에게 보이려고 쓴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보통 사람들의 애틋함, 절절함을 담은 ‘마음’이다.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책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글이 그 어떤 명문보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오랜만에 왔지요? 몇 번이고 오려고 했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게 인간사이구려. 장마 때문에 무척이나 울었소. 언제나 그렇게 생각이 나는지 옛날이 그립구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미련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용미리를 찾았소. 덧없는 세월, 왜 이리 서러운지. 무엇이 그렇게 슬프게 하는지. 아무런 미련 없이 내 곁을 떠난 사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텅 빈 머리만 남기고 세월이 가기만을 바라는 바이오.”(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떠난 오늘까지 한순간도 네 환영이 엄마 마음속을 떠난 날이 없었단다. 네가 떠오를 때마다 엄마 마음은 미어지고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단다. 어느 순간엔 차라리 너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란다.”(엄마가 아들에게)

실린 글들은 대체로 짧다. 애통한 마음이 가득 찬 이들이 무슨 긴 글을 쓸 경황이 있었겠는가. 대신 여운이 길다. 글솜씨와는 무관하게 순정한 슬픔이, 절절한 그리움이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책은 무수히 많다. 종류도, 품격도 다양하다. 하지만 마음을 울리고, 옷깃을 여미도록 하는 책은 드물다. 가끔 이 책을 뒤적인다. 몇 쪽만 읽어도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서다. 이 책의 힘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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