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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미서 향수 달래는「또순이」5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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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산토도밍고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인 피아 알타그라시아 공단에 있는 BJ&B사는 한국의 중소기업 유?? 실업이1백% 출자, 도미니카에 설립한 모자 제조업체다.
모자는 봉제와 마찬가지로 재봉틀을 돌려 만드는 노동집약적 업종이다.
취재팀이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7시로 작업은 이미 끝났고 남자 직원 몇 명이 5백60여 평의 넓은 공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노동법이 잘 발달된 도미니카에서는 잔업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오후4시 반이면 일을 끝낸다.
때문에 한국에서 파견된 근로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공장에서 2백엔 정도 떨어진 낮은 언덕에 자리잡은 기숙사를 찾아야 했다.
50여평 규모의 목조 단층주택 3채가 나란히 서 있는 기숙사는 숲이 우거진 동산을 북경으로 하고 앞이 넓게 틔어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나란히 서있는 3채 중 가운데 집을 찾아 들어서니 아리따운 한국아가씨 5명이 취재팀을 반긴다.
서울 본사의 7백 여명 직원 중 건강·교양·외모·기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엄선한 베테랑 여성근로자들이다.
25세의 안명숙양을 필두로 각각 한살 차인 김민자·이금숙·최봉순·노미경양 등 5명이 이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도미니카에 파견된 우리나라 여성근로자들은 이들을 포함해 1백 여명. 카리브해 연안국가를 전부 합하면 4백 여명으로 여기에 개별적으로 미국인회사에 근무하는 여성근로자를 합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섬유봉제업체의 해외이전으로 여성근로자들의 대대적인 해외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4백 여명이 진출>
월남전과 중동특수경기로 남성근로자들이 대거 해외로 나갔듯이 중미지역의 섬유산업 진출은 여성근로자들의 대대적인 해외진출을 가져온 셈이다.
이들은 국내에서 섬유산업을 우리의 수출주종품목으로 키워냈듯이, 이제 해외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는 석유봉제업체들이 현지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근로자들의 해외진출은 남자들과는 다른 특수성 때문에 본인들이 결단을 내리는 데서부터 현지 생활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 결정하는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 7년에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도미니카가 너무 못사는 나라라고 집안에서 무척 말렸습니다. 그래도 견문을 쌓는데 좋을 것 같아 겁없이 왔습니다.』
『집에서는 아직도 제가 미국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곳은 국내보다 월급이 두 배입니다. 가사를 돌보는데 그만큼 유리하죠』
비슷하면서 약간씩 다른 이유로 해외근무를 결심한 이들은 연수차 서울에 온 6명의 도미니카 여성근로자들과 3개월 간 숙식을 같이하며 스페인어를 익혔다고 했다.
큰 키에 구부정하고 얼굴생김새도 다른 도마니카 여자들을 보고 처음에는 인사도 못 건넬 정도로 어색했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이내 어울릴 수 있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난 것은 88년3월13일.「왜 울었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눈이 퉁퉁 부어」서울을 떠났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뉴욕에 1시간 반 가량 머물 때는 밀입국을 감시하는 공항직원이 일행 숫자를 계속 헤아리며 화장실까지 좇아와 큰 곤욕을 치렀다.
도미니카 생활은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움은 없었다.
현지 인에게 작업을 가르치고 관리하는 정도의 일로 언어상의 불편을 겪는 일도 없었고 힘든 일은 의논해서 같이 처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10년 전 단신으로 이곳에 와 미국인회사에 월급1천 달러를 받는 슈퍼바이저로 성공한 선배근로자 안경자(30)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씨는 이곳 도미니카에 와있는 여성 근로자들 중에는 개척자.
(주)서광에서 노조위원장을 하던 그녀는『외국에 나가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79년 도미니카에 있는 레인코트를 만드는 미국인회사에 취업했다.
도미니카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지만 외국하면 무조건 잘사는 나라로 생각했고 거기에 가면 견문도 넓어지고 신나는 일도 많을 것 같아 주저 없이 도미니카 행을 결심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순진한 생각은 도착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사로 가는 길은 1시간 반을 달려도 집 한 채 나타나지 않는 허허벌판이고 이따금 지나가는 현지 인들은 맨발에 원시인이나 다름없었다.
공장이 있는 마을에 도착해 신호등에 차를 멈추면 수십 명씩 떼로 몰려와 구걸을 하는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기가 막힌 일은 더 많이 벌어졌다.
말이 통할 리 없어 먼저 재봉틀을 돌려 시범을 보이고 입 하나, 손 둘, 발 둘을 합해「5개 국어」로 뜻을 전달하는데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곳 현지 인들은 손바닥의 지방질이 두꺼워 손끝의 감촉으로 일을 해야 하는 재봉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재봉틀은 특히 손과 눈이 같이 나가야 하는데 소질이 없는 도미니카 사람들은 게다가 재봉틀을 처음 만지다보니 손과 눈이 따로 놀게 마련이었다.
당시 교민이라고는 음식점을 하는 김공노씨 뿐이어서 한국말로 신나게 하소연할 상대도 없고 하고 한 날을 혼자 울음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문화적 갈등 고민>
안경자씨에 비하면 최근 2, 3년 사이 도미니카에 대거 진출한 여성 근로자들은 외로움도 덜한데다 현지 말도 미리 익히는 등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능력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 해소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한번은 현지인 근로자가계산기를 급히 찾았다. 계산기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7더하기 8을 계산해야 하는데 계산기가 없어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7더하기 8은 15인데 계산기가 필요 있느냐고 대답했더니 천재를 만난 듯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런 일들 때문에 한국인근로자사이에는 한국말로 얘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혹시나 자기들 흉이나 보지 않을까 해서인지 한국말 대화에는 무척 화를 낸다.
이곳 사람들은 느긋하다 못해 게으른 편이다.
식당에 가도, 미장원엘 가도 2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다.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분이 좋을 때도 한국식 표현은 이곳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혼자서 우리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왜 울고 있느냐고 반문하기 일쑤였다.
우리 노래가 그만큼 애조를 띠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정열적인 음악과 디스코를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랑과 애인 얘기다. 성이 일찍부터 개방된 탓이다.
그래서 잔업 등 어려운 일을 시킬 때는 먼저 애인 얘기를 꺼내 기분을 풀어준 다음 일을 시키는 것이 순서다.
그러나 도미니카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좋은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생활이 가난하지만 우리처럼 각박하지는 않다.
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한국인 여성근로자가 도미니카 남자와 결혼했을 때한 현지인 여공이 한달 치 월급을 축의금으로 내놓았다.

<성 개방풍조 만연>
공장장이 말렸지만「친구가 결혼하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한다」고 막무가내더라는 것. 일을 끝내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동료끼리 한국말로 실컷 지껄일 수 있고 긴장도 푸는 즐거운 시간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취침해야한다.
날씨가 열대성으로 몹시 더워 하루저녁 밤잠을 설쳐도 그 다음날이면 몸이 붓는 등 달이 나게 마련이다.
특히 일과후의 외출은 절대 금물이다. 성 개방풍조가 만연되어 있어 디스코테크라도 드나들게되면 이국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한국인 종업원들이 자칫 허물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마을에서 떨어진 공장 옆에 기숙사를 마련한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무한정 묶어 놓을 수는 없어 회사에서는 단체로 극장 쇼핑 등을 시키고 주말이면 관광명소로 야유회를 가는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도록 해주고 있다.
이들의 월급은 한국에서 지불하는 금액의 두 배다. 입사7년 경력의 안양은 44만원, 4년째인 최양은 38만 원이다.
그리나 이들이 현지에서 용돈으로 쓰는 돈은 1백 달러 미만이다. 돈 쓸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3년 만기 1천만원짜리 재형저축으로 24만∼27만원을 지출하고 여력이 있는 사람은 정기적금 하나를 더 붓는다.
3년 계약기간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아버지 환갑에 사업자금으로 재형저축 통장을 내 놓겠다는 등 계획도 서있었다.
이들 또순이 들로 인해 도미니카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글 한종범 기자|사진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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