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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농단에 공공기관 감찰 못했다” 영장기각 사유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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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26일 새벽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나온 뒤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법원은 이날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김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뉴스1]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26일 새벽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나온 뒤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법원은 이날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김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뉴스1]

‘환경부 블랙리스트’ 관여 혐의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김 전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서울동부지법 박정길(53·사법연수원 29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6일 오전 2시 462개 글자를 써 사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 사유에 일반적인 영장 기각 때와는 다른 이례적 설명이 많은 데다 정치적 표현까지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김은경 전 장관 영장기각 파장 #법조계 “판사인가 정치인인가” #인사채용 협의를 관행으로 판단 #“전 정부 사람들엔 중형, 잣대 달라”

박 부장판사는 먼저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공공기관에 대한 감찰권이 행사되지 않았던 사정이 있다”며 “(현 정부가) 공공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인사 수요 파악의 필요성, 감찰 결과 (일부 임원에 대한) 비위 사실이 드러난 점에 비추어 김 전 장관의 혐의에 다툼이 있어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기에 등장한 ‘최순실 일파(一派)’라는 표현이 첫 번째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일파는 학문이나 종교, 예술·무술 따위에서 한 갈래를 의미한다.

이를 두고 판사가 법리보다는 정치 용어를 택했다며 비판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법무법인 이경의 최진녕(48·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는 “행위는 나쁘지만 상황이 그랬으니 괜찮다는 건 최순실 일당은 다 나쁘니까 나쁜 짓 하는 걸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한 거라 양해가 된다는 건데 지금까지 이런 불구속 사유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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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부장판사가 채용비리와 관련해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은 장시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 대목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왔다. 순천지청장 출신의 김종민(52·사법연수원 21기)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같은 사안을 놓고 지난번(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엔 블랙리스트라며 중형을 선고하고, 이번에는 인사 협의 관행에 따른 것이라며 구속영장 기각”이라며 ‘로또 사법의 시대’라고 적었다. 최진녕 변호사도 “의사들 리베이트도 지금까지 관행이었다”며 “판사인가 정치인인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또 영장 기각 사유 마지막에 적은 ‘직권을 남용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다는 구성 요건에 대한 고의나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 보이는 사정이 있다’는 표현에도 논란이 일고 있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판사 생활 30년 하면서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 보이는 사정’이라는 사유는 처음 본다”며 “나중에 양형 심사 기준은 될 수 있어도 기각 사유로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김 전 장관이 블랙리스트를 실행할 당시 문체부 블랙리스트로 전직 정부 관계자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고 있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위법성 인식이 희박하다는 법원의 판단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각 사유에 1993년 7월 내려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것도 논란거리다. 당시 판결은 교도관의 접견신청 허용에 관한 직권 남용에 관한 결정이다. 재판장이던 김석수(87) 전 국무총리는 교도관의 접견신청 거부에 대해 애초부터 직권남용에 대한 범의(犯意)가 없어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판사 출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 다른 잣대를 들이댄 것으로 유감스럽다”며 “26년 전의 대법원 판례까지 인용했다는 부분에서 납득이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 동부지검 관계자는 “법원의 판단은 존중하되 다시 효율적으로 (수사)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김민상·박사라·박태인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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