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희철의 졸음쉼터

만물현기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태초에 현대·기아차가 계시니라. 모든 결함과 사고가 현기차로 말미암았으니 현기차 없이 리콜이 없느니라.’

자동차 업계에서 사고가 터지면 무턱대고 현대·기아차부터 욕하고 본다는 일명 ‘만물현기설.’ 이를 기록한 경전이 있다면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현대차는 최근 내놓은 신차에 기어봉 대신 버튼 형태의 변속기를 택했다. 이를 두고 엉뚱하게 ‘현대차는 위험하다’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버튼식 변속기는 수입차 브랜드도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주장은 형평성은 없지만 논리라도 있다. BMW 차량 화재나 폴크스바겐의 디젤게이트 기사 댓글에도 현대·기아차가 종종 등장한다. 현대차그룹이 한국 정부는 물론 독일·미국 안전·환경 규제기관까지 주무르다가 결국 사고가 터졌다는 이론(?)이다.

만물현기설이 널리 확산하자 기원후 2015년 현대차는 국내마케팅실 산하에 이들과 맞서 싸우는 십자군을 조직했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소그룹에서 일하는 4명의 대리·과장은 블로그·페이스북·트위터에서 성전을 벌이고 있다. ‘내수 차별설’에 맞서 이들은 한·미 양국에서 각각 생산한 쏘나타를 정면충돌시켜 비교했고, ‘쿠킹호일설’이 나오자 기아차 카니발을 13m 높이에서 수직 낙하시키면서 맞섰다.

덕분에 누명이 어느 정도 풀렸다지만, 그럼에도 꽤 많은 사람이 만물현기설에 공감한다. 현대·기아차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현대·기아차는 여전히 국내 소비자에게 품질을 믿는다는 신뢰를 충분히 주지 못한다. 검찰은 지난달에도 세타Ⅱ 엔진 결함 은폐 의혹을 수사하기 위해서 현대차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지난달 현대·기아차는 국산차 시장의 82.7%를 점유했다. 국내 소비자가 현대·기아차를 너무도 사랑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딱히 경쟁 상대가 부족해서라는 분석도 일리가 있다. 독일 명차가 폴바셋 커피, 기타 국산차가 자판기 커피라면, 현대·기아차는 빽다방 커피일 수 있다. 어쩌면 국내 소비자는 자판기 커피는 맛이 없고 4700원은 비싼 것 같아서, ‘앗!메리카노’를 골랐을 수 있다.

문희철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