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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수평으로 뉘어버리자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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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있다. 이를 뒤집으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는 하늘도 돕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조(自助) 정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19세기 개혁 사상가 새뮤얼 스마일스는 이 말이야말로 인류 발전의 경험을 압축한다고 말한다. 자조 정신이 개인 성장의 원천이고, 국가의 활력과 강한 힘의 근원이라는 얘기다. 스스로 돕는 '내부로부터의 도움'은 활력을 높인다. 그러나 밖으로부터의 도움은 종종 사람을 약하게 하고 자립의 필요성과 자극을 앗아간다. 또 사람이 과도하게 남의 지도나 통제를 받으면 무기력해지는 게 불가피하다고 스마일스는 주장한다.

자조 정신을 '발전의 정신'으로 승격(?)시킨 사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장경제주의자인 좌승희 박사다. 좌 박사는 최근 발간한 '신(新)국부론'에서 스스로 노력해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조 정신이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논리를 빌리면 세상엔 수직적 세계관과 수평적 세계관이 있다. 우리의 삶엔 일종의 사다리가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뤄내느냐에 따라 사다리 내의 일정한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자조 정신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어느 위치에 놓이느냐를 선별하는 것은 하늘일 수도 있고, 사회와 주위의 동료, 또는 경제학적으로는 시장일 수도 있다. 이른바 '수직적 세계관'이다. 수직적 세계관은 '차별화'를 있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런 수직적 사다리를 수평으로 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 평등의 믿음에 기반을 둔 '수평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사회 부조리 등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수평적 세계관은 현실의 비인간적 요소에 분개하는 정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인간의 이상이 반영된 셈이다.

수직적 세계관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더라도 수평적 세계관의 선(善)기능도 만만치 않다. 차별화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장치가 수평적 세계관에 의해 마련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평적 세계관이 보완적 기능에 머물지 않고 주도적 흐름이 될 때다. 사다리 자체를 수평으로 뉘어버리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포퓰리즘에 사로잡혔던 남미의 경험이 수평적 사다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부동산 부자에 대한 징벌적 세금인 종합부동산세는 수평적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동산 이익을 열심히 발품 팔아 번 투자이익으로 보지 않고 나쁜 짓을 해 벌어들인 투기이익으로 간주해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부세뿐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 사다리를 수평으로 뉘자는 평등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열린우리당이 경제를 챙기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해 열린우리당이 만든 기구가 서민경제회복위원회다. 그런데 국민 경제를 살리겠다고 하지 않고, '서민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강조한 의도가 뻔히 보인다. 부자와 서민으로 나눠 공략하려는 정치적 속셈이 깔린 것이다.

정부가 어제 발표한 재산세 대책도 마찬가지다. 6억원 이하 주택의 소유자는 서민과 중산층이므로 이들은 투기와 무관하고, 따라서 이들의 재산세는 낮춰 주겠다는 것이다. 6억원을 기준으로 투기와 실수요를 구분하고, 6억원 이상 주택 소유자에겐 징벌적 세금을 물림으로써 사다리를 보다 평평하게 만들겠다는 의미다.

서민 경제를 챙기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서민과 부유층을 대립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5.31 지방선거 직후 서울 성동구의 한 자영업자는 "여당이 강남 부유층을 잡으려 한다는데 이들이 돈을 안 쓰는 바람에 서민들 살림살이만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본지 6월 2일자 1면). 평등주의가 의도와 달리 서민에게 더 주름살을 안겨주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수평적 세계관에 입각해 서민을 위한다고 나서면 서민의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경제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