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의 김혁철 고민, "계속 협상할 수 있나 의구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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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비건 미 대북 특별대표가 11일 워싱턴 대담 행사에서 "아무 권한이 없는 북한 상대와 협상은 많은 스트레스였다"라고 말했다.[이광조 JTBC 카메라기자]

스티브 비건 미 대북 특별대표가 11일 워싱턴 대담 행사에서 "아무 권한이 없는 북한 상대와 협상은 많은 스트레스였다"라고 말했다.[이광조 JTBC 카메라기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빅딜’을 제안함으로써 외교의 공간과 모멘텀을 창출했다.”

스티브 비건 미 대북 특별대표가 11일 핵 정책 회의 대담에서 “완전한 비핵화 때까지 단계적 제재 해제는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론을 옹호하면서 한 말이다. 비건 대표는 지난주 5일 열린 상원 외교위 비공개 브리핑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결렬을 선언하고 걸어 나온 게 오히려 앞으로 ‘진지한 협상’의 여건을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일괄타결 빅딜로 목표는 높였으면서도 하노이 이후 후속 협상에 대한 의지를 보인 셈이다. 복수의 외교 소식통들은 12일 “비건 대표가 일단 자신감을 보였지만 협상 상대인 김혁철 대미 특별대표와 협상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의문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외교 소식통 "하노이 실무 협상 때 신뢰 잃어" #비건 "권한없는 상대와 협상, 많은 스트레스" #영변 폐기 대상 못밝히다 막판 최선희 뛰어와

소식통들에 따르면 비건 대표가 김혁철 대표에게 가진 의구심은 협상 상대로서 신뢰의 문제와 북한 협상 대표로 계속 나올지 교체 가능성 두 가지다. 외교 소식통은 “비건 대표가 하노이 준비 협상에서 김혁철에 대해 상당히 신뢰를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표에게 평양 실무협상부터 줄곧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의 정의를 요구했지만 답을 듣지 못한 게 첫 번째 이유다. 김 대표는 자신들이 제안한 영변 폐기 카드의 대상 시설의 범위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회담장을 떠난 뒤에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영변 내 모든 시설"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뛰어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다른 소식통은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김혁철이 계속 후속 협상 대표를 맡을지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협상 대표 교체 가능성과 관련한 조짐은 지난달 말 하노이에서부터 있었다. 지난달 28일 확대 정상회담에 비건 대표는 배석했지만 김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다. 회담 무산 뒤 심야 반박 회견도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이 담당했다. 북한이 공개한 75분 분량의 회담 다큐멘터리에선 김 위원장 실무대표단의 협상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 최 부상이 등장했고 그 옆자리에 앉은 김 대표 모습은 살짝 등장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하노이 회담 무산의 충격에서 회복해 내부 평가를 한 뒤 후속 협상 전략을 마련한 뒤에야 협상 대표를 누구로 세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밤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실무협상 결과를 보고 받는 모습.[북한 다큐멘터리/N.KOREA NOW 유튜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밤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 호텔에서 실무협상 결과를 보고 받는 모습.[북한 다큐멘터리/N.KOREA NOW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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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대표도 직접 대담에서 “민간에 있을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며 협상의 고충을 길게 설명했다. 김 대표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협상장에 들어가면서 상대도 똑같은 위임을 받고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북한은 전혀 다른 체제”라며 “내부 토론이나 부처간 협의가 없는 상명하달로만 움직이는 상대와 협상은 많은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지도부의 신임을 받고 협상 권한을 가진 적임자라는 가정 아래 협상을 해야 하지만 북한은 ‘복잡하다’는 말이 아주 절제된 표현일 정도로 내가 민간에서 했던 협상과 전혀 달랐다”고도 했다.

그는 “실패의 결과가 양국 모두에 막대하기 때문에 중압감도 작용한다”며 “김 위원장은 내 상대에게 협상의 여지를 주고, 유연성과 순발력, 창의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김혁철 대표에겐 아무 협상 권한이 없었다는 뜻이다.
국무부 고위 관리도 지난 7일 브리핑에서 “지난 하노이 정상회담 준비에서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비핵화였다”며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데 결정적인 이 문제를 진전시킬 권한이 북한 측 교섭 상대에겐 거의 없었다”고 시인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서울=이유정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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