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획연재 한민족의 자아각성 그 연원을 찾아서-12 벼슬길 멀리하고 「붓」을 살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옥 (1760∼1812)은 박지원 (1737∼1805) 보다는 후배이고, 정약용 (1762∼1836)보다는 선배인 18세기후반, 19세기초의 작가였다. 그 두사람보다 모자라지 않은 역량으로, 그 두 사람의 취향을 아우른 듯한 작품세계를 이룩했다.
그런데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마당한 평가를 밪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살아 있을 때 아주 불우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응시했다가 시련을 겪었을 따름이고, 끝내 문료에 급제하지 못했으며 아무 벼슬도 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저술이 문집으로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인 채로 어렵게 전하는데, 그 대부분을 어느 고서점 주인이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아 연구에 큰 지장이 있다.
이옥의 생애는 힘써 연구해도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32세때에 쓴 글에서 경기도 남양 매화산 아래의 본가에 부모·아내·자식이 있는데 오랫동안 가보지 못하고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한다고 했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몇몇 노복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다 한다. 집 앞 빈터 소금밭을 갈아 수수를 심었으나 실패한 내력을 적은 작품이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남양은 당시의 남양부이고, 오늘날의 경기도 화성군 서쪽 일대가 거기 해당한다. 그런데 매화산이란 산은 없고, 서신면에 매화리가 있다. 매화리에 몇 마을이 포함되는데 바닥골은 서신면 소재지이고 매골이 한적한 곳이다. 거기서 바다가 가깝고 염전이 이어져 있다. 이옥은 자기 마을을 매암이라 일컫고 그 말로 호를 삼기도 했다.
오늘날의 경기도화성군서신면 매화리 매골이 바로 매화산 밑 매암이라고 적던 이옥의 마을임을 의심할 수 없는데, 애써 거기까지 가보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 근처 어디에도 후손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이옥의 이름을 들었다는 사람도 없었다. 이옥이 문벌을 이루어 일가와 함께 살지않고 재산도 변변치 못했기에 그곳에 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듯하다.
할아버지가 종6품 무반직에 있었고 아버지는 벼술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밝혀졌으니 그럴만 했다.
그런데 이옥은 30대에 성균관유생 노룻을 하면서 서울에 머물렀다. 초시에 급제했으니 성균관에 들어갔고, 거기서 공부하면서 대료 준비를 했다. 능력이 있어 집안의 불운을 씻을 진출이 기대되였다 하겠는데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30대에 성균관 유생>
정통 고문에서 벗어난 소설문체를 사용한다해서 견책당했다. 그 때문에 이름이 실록에 올랐으며, 과거를 보면서 문체를 어지럽혔다고 충군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임금 정조는 박지원이『열하일기』등의 저술에서 시험한 정통에서 어긋난 소설체 한문 문장이 유행해 가치관을 어지럽힌다고 나무라고, 이른바 문체반정을 일으켜 질서를 수호했다.
아직 성균관 유생에 지나지 않던 이옥이 거기 걸려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반역의 주범인 박지원은 가문이 혁혁하고 명성이 높아 정작 별다른 징벌을 받지 않았는데,말석동조자에 지나지 않은 이옥은 충군되는 신세가 되었다. 충군이란 양반 신분을 박탈하고 상민으로 격하시켜 군대에 보내는 조치다. 당시에 양반은 군대에 가지 않고, 상민만 병역의 의무를 졌다.
36세 때에 처음 충군되였다가 그 시련이 거듭되어 40세 때인 1799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멀리 경상도 삼가에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군사 노릇을 한것은 아니고 숙소를 정하고 밥을 사 먹으면서 공연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군사로 쓰기 위해서 거기 가라고 한것은 아니고 글 공부할 자격을 박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런데 이옥은 삼가에 머무르는 동안에 듣고 본 바를 이것저것 글로 적어 『봉성문여』를 마련했다. 「봉성」은 삼가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을 써서 말썽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정통 고문으로 돌아가는 자세를 보이지도 않고, 사실을 간략하게 적기만 했다. 글다운 글이 못되기에 「문여」라 했다.

<신분격하 군역징집>
풍속을 살핀 내용이 있기는 하나 자세하지 앉아 요긴한 자료라 할수 없고, 논평을 곁들이지않아 이옥의 사상을 아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기록한 것 자체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거기 『시기』가 있는데, 시장 북쪽에 있는 자기 거처에서 12월27일 하룻동안 시장의 모습을 살핀 내용이어서 도리어 관심을 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사람이 있다.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이 있다. 닭을 품고 오는 사람이 있다. 문어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다.」이렇게 적기 시작해서, 장에 가져오는 것들, 오는 사람, 사람들의 차림새, 서로 만나 수작하는 방식 등을 보이는 대로 그렸다.
문장의 멋은 조금도 부리지 않고, 되풀이할 필요가 있는 말은 계속 되풀이했다. 그래서 「서로 만나 허리굽혀 절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 화를 내고 다투는 사람도 있다. 남녀가 서로 손을 잡고 희롱하는 사람도 있다.」는 데까지 무관심의 관심을 나타냈다.
지금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소재지인 그 곳에 1백90년만에 다시 가보니 2일과 7일이 장날인 것이 변하지 않았고, 장이 서는 곳도 그대로이고 이옥이 머물렀다고 한 객점 자리에 지금도 음식점이 있다. 거기자리 잡고 이옥처럼 장을 살피니, 장꾼들이 가져와서 파는 물건이 거의 없어진 점이 크게 달라졌고, 서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도 없이 지나치기 일쑤여서 세태가 변한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차이점은 나는 머리가 복잡해 이옥이 했듯이 아무런 의미부여 없이 보이는대로 관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옥은 자기시대에 예삿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 글에다 올리는 것을 긴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아무런 주장을 내보이지도 않고 구현하는 항변은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한문의 격식에 반발>
『이언집』이라고도 하고,『예임잡패』라고도 하고, 전하는 사본에 따라 이름이 다른 시집은 한시를 수록하기는 했는데 모두 다 아낙네들의 푸념을 민요처럼 나타냈다.
「위군사나해 여자시탁신 종부가련아 여하학아빈」이라고 한 것을 하나 들어보면, 「당신이 사나이라고 여자 몸을 맡겼는데, 나를 어여삐 보지는 못할 망정 어쩌자고 구박이란 말이오」라는 사연을 그렇게 나타냈다.「사나해」가「사나이」여서 한문으로 새길 수는 없게 적었다.
이런 작품을 장난 삼아 지은것은 아니다. 『이언집』서두의 긴서문에서, 자기는 조선 사람이므로 중국의 국풍, 악부, 사곡 따위와는 다른 조선의 민요를 노래한다 하고, 남녀관계를 여성의 감각으로 나타내야 인생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요지의 파격적인 주장을 폈다.
한문을 버리고 국문 문학을 택하지는 못했지만 한문을 국문에다 최대한 접근시키는 시도를 했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모아 전이면서 소설인 작품을 마련할 때에도 한문의 고답적인 격식에 대해서 반발했다.
『유광억부』에서는 과거 답안을 파는 세태를 그렸다. 주인공 유광억은 돈을 받고 과거 답안을 지어 주는 영업으로 이름이 났다. 시관들이 기어코 유광억 본인을 급제시키려고 별렀지만, 뽑힌 글은 모두 유광억이 돈 받은 액수에 따라 차등을 두고 지어 준 것들이였다.
그 경위를 조사하려고 잡으려했더니 유광억은 강물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다했다. 과거 시험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그런 방식으로 나타냈다. 『이홍부』에서는 김선달형 사기꾼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고서, 세상은 바야흐로 사기꾼 세상이 되어 『천하를 속이는 자는 임금노릇을 하고, 그 다음은 제 몸을 영화롭게 하고, 그 다음은 집을 윤택하게 한다』고 했다.
충군을 당하고도 붓이 살아 이런 말까지 썼는데도 생애를 무사히 마친 것은 벼슬길에서 아주 멀어진 행운 덕분이었다고 할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