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길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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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시가 장형화하고 있다. 최근 장편서사시·서사시·혁명장시·장편연작시등 나름대로의 장르명칭을 붙인 긴 시들을 담은 시집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어 장편·대하등 소설의 대형화와 짝을 이루고 있다.
금년들어 단행본으로 발표된 긴 시들은 최형의『푸른 겨울』(창작과비평사), 오봉옥의『붉은산 검은피』(실천문학사), 박정은의『광주의 깃발』(인의), 김명식의 『유채꽃 한아름 안아들고』(동광출판사), 김희수의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 라도』(동광출판사), 이기형의 『지리산』(아침)등과 지난주에 간행된 김계덕의 『불의 한강』(문강), 이정기의 『삼국유사』(한신문화사)등을 들 수 있다.
이 시들은 길이가 길다는 공통점이외의 장르상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푸른 겨울』은 각기 좌·우익 편향의 두 친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6·25를 다루고 있다. 형식은 운문과 산문을 뒤섞었다. 시에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 산문도 취했다는 것이 시인의 말이다.
『광주의 깃발』은 70여편의 연작시로 구성, 80년5월 광주항쟁의 전과정을 그리고 있다. 유신정권의 와해로부터 시작하여 신군부의 대두·하극상 사건의 전말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매편의 시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어 서사적 형태로 보이기는 하나 서사적 주인공은 없다.
『오늘은 꽃잎으로 누울지라도』도 역시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리고 있다. 서사적 주인공 석이를 내세워 그의 눈으로 광주항쟁의 전말및 항쟁의 필연성을 다루고 있다.
『유채꽃 한아름 안아들고』는 제주4·3항쟁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서시 및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은 사건의 전개나 서사적 주인공도 나타나지 않고 주제를 제주로 했을 뿐인데도 서사시란 명칭을 붙이고 있다.
『한강의 불』은 한강주변의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강에 대한 모든 화제를 시의 소재로 등장시켰다. 물론 사건이나 서사적 주인공은 없다. 단지 시로 풀이해본 한강의 역사, 민족의 역사다.
전 6권으로 기획, 현재 3권까지 출간된 『삼국유사』는 알타이어계의 선구적개화족인 사리족, 즉 동이족이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단군신화의 고조선을 건설하는데서 출발하여 한반도로 이동하게 된 후 다시 삼국을 건설하는 왕과 영웅들의 신화를 그릴 예정이다.
이같이 순수·참여 할것 없이 시가 길어지고 있는 것은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참여 시인들이 동시대의 어두웠던 역사를 조명하고 총체적 전망을 획득하기 위해 시의 길이를 늘리고 있는가하면 순수시인들은 짧은 시로써 음풍농월만 할수 없어 깊숙히 역사속으로 침잠하고있는 듯하다.
시대적 상황이 편안하게 시인과 조화를 이룰 때 시인은 세계와 자아의 심연을 향한 서정적 자아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힘들 때 자아는 세계와 대결하게 된다. 이런 대결양상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시가 길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러나 현재 너도 나도 앞다퉈 발표하고 있는 긴 시들이 길어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띠고 길어지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운문으로 나열, 한줌의 읽을거리도 안되는 것을 수천행씩 늘리고 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또한 긴 시들의 개념정립과 함께 형식개발도 시급하다. 한 주제아래 수십편의 단시를 모아놓고 어떤 시는 서사시, 어떤 시는 연작시, 또 어떤시는 장시등 상이한 이름을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또 총체적 전망을 담보하기 위한 긴 시일지라도 메시지가 아니라 감동의 전달임을 인식, 형식개발에도 노력해야만 소설과 단시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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