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 이보다 '아름다운 동행' 있을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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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고민영씨(左) 부부가 4년간 돌본 사지마비 환자 박복희씨를 휠체어에 태운 채 제주공항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이모, 외국에 온 것처럼 기분이 참 좋아. 나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 줘야 돼."

남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직형 사지마비로 광주기독병원에 입원 중인 박복희(30.여)씨. 그는 27일 오전 10시45분 광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나들이에 나섰다.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소인국 테마파크.천제연폭포.여미지식물원 등을 구경했다.

박씨에게 이번 제주도 여행은 중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 이후 1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나 기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의 병상을 지키느라 여행은 물론 외출 한번 제대로 못한, '이모'라고 부르는 간병인 고민영(58.여.광주시 동구 학동)씨와 함께하는 바깥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박씨와 고씨의 '아름다운 여행'은 광주기독병원과 나눔봉사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가게'의 배려로 이뤄졌다. 올해로 개원 101주년을 맞은 광주기독병원은 이를 기념해 장애인 환자 중 한 명을 뽑아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간호사.물리치료사 등이 추천한 20여 명 중 박씨를 그 대상으로 선정했다.

선천성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난 데다 24세 때 목뼈를 다쳐 몸을 움직이지 못해 4년째 입원 중인 박씨와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고씨를 위로하기로 한 것이다.

고씨는 2002년 10월 간병을 맡으면서 박씨와 인연을 맺었다. 처음 한 해 동안은 돈을 조금씩 받았다. 그러나 박씨의 집이 어머니조차 뇌졸중으로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지자 이듬해부터 3년째 무료로 간병하고 있다.

10여 년 전 남편 유영봉(65)씨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저는 고씨의 정성은 극진하기 짝이 없다. 고씨는 자기 집에는 금요일 오후에만 두어 시간 들를 뿐이다. 이때를 빼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씨의 곁에 붙어 식사.목욕 등을 돕고, 대소변 수발을 하고 있다. 집안 살림은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한 남편 유씨가 대신하고 있다.

2남1녀를 둔 고씨는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이지만, 내가 배를 아파 낳은 딸보다 더 진한 정을 느낀다"며 "우리 집 살림도 넉넉하지 않아 더 잘 챙겨 주지 못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부모.형제와도 연락이 거의 끊긴 상태다. 이 때문에 국민기초생활 수급대상자인 박씨에게 나오는 정부보조금만으론 치료비가 턱없이 모자라 고씨 부부가 자녀들에게서 받은 용돈 등을 모아 월 30만~50만원을 부담하고 있다.

병원 측은 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름다운 가게' 광주본부와 함께 22일 병원 광장에서 의사.간호사.직원들이 내놓은 1200여 점의 물건을 가지고 나눔장터를 열었다. 여기서 300여만원이 모아졌고, 이 중 일부로 여행을 보내고 나머지는 박씨와 고씨 부부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병원 측은 또 박씨가 여행 중에 위급한 상태에 빠질 경우에 대비해 물리치료사를 동행시켰다.

병원 측은 당초 1박2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박씨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이날 오후 7시55분 비행기로 광주로 돌아오는 당일치기로 끝냈다. 광주기독병원의 김덕현(52) 홍보과장은 "박씨와 고씨 부부의 눈물겨운 정분에 감동해 세 사람을 함께 여행 보내주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해석.양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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