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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기업이 원하면 정책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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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최근 싱가포르 도심 번화가인 오차드(Orchard) 거리. 한 대형 쇼핑몰에 세일 행사를 알리는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할인율은 최고 70%.

예년의 경우 싱가포르 유통가는 연말.연초 딱 2회 세일이 있었고 할인율도 많아야 3~40% 정도였다. 더더구나 피서객이 많아 성수기인 여름세일은 없었다.

예년 같으면 비즈니스맨들로 북적여 방을 못구하던 특급호텔도 요즘 '3일 숙박하면 하루 방값 무료'라는 광고를 고객에게 하고 있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칭송받던 싱가포르 경제가 요즘 중병을 앓고 있다. 제조업은 저임금을 앞세운 중국과 말레이시아로 빼앗기고 덩달아 금융까지 이탈하는 형국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사스)까지 재발, 하반기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1985년 이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연평균 7.3%였던 싱가포르의 올해 성장률 예상치는 1% 이하다.

결국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경제를 수술대 위에 올렸다. 모든 정책을 보다 더 기업 위주로 하기 위해서다.

◇기업이 원하면 정책이 바뀐다=싱가포르는 다음달부터 근로자를 위한 연금제도인 '중앙강제기금(CPF)'의 기업 부담률을 현행 급여의 16%에서 13%로 끌어내린다. 고임금 구조를 해결해 외국기업이 이탈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2005년에는 다시 기업 부담률을 10%까지 줄일 예정이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테오 셜리(35.여)는 "근로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부담"이라며 "정부의 자세를 봐서는 앞으로 다시 경제가 좋아진들 연금이 회복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한숨지었다.

삼성전자는 최근 현지의 대표적인 빌딩인 '선텍 시티'입구에 대형 영상 광고판을 설치했다. 싱가포르 당국은 그간 이 같은 대형 광고판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운전자 등의 시야를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억제해 왔지만 최근 외국기업이 원한다면 가능하다며 정책을 바꿨기 때문이다.

최태봉 삼성전자 지사장은 "이곳 공무원들은 외국기업이 원하면 언제든지 대화에 나서고 정책도 기업 위주로 변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껌없는 깨끗한 나라'라는 싱가포르의 별칭도 사라질 위기다. 껌 유통을 엄격히 제한해 오던 정부가 지난 5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하면서 미국 식품회사들이 껌 판매를 요청하자 이를 허용한 것.

싱가포르 경제개발위원회(EDB)의 재클린 탄 부문장은 "외국기업들이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국가별 전용 인큐베이터 시스템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사회간접자본 운영권도 내준다=항만운영을 총괄하는 PSA는 지난달 중국 화물운송사인 코스코에 정박장 두곳의 지분 49%를 넘겨주고 공동 운영하는 계약을 했다.

PSA는 그간 모든 선사들을 공평하게 대우한다는 원칙 아래 항만 운영권을 특정 선사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외국 대형 선박사 두곳이 말레이시아로 옮겨가자 '큰 손 고객'을 우대하기로 정책을 바꿨다.

한편 지난달 홍콩의 정치경제위험자문공사(PERC)가 세계 주요 14개국의 인건비 부담을 0~10으로 지수화해 평가한 결과 싱가포르의 인건비 부담지수(5.5)는 말레이시아(3.9).중국(2.0)은 물론 미국(5.07)보다 높았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한국의 인건비 부담지수(6.0)는 일본(8.5) 다음으로 가장 높았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 싱가포르지사 관계자는 "아무리 도시국가라지만 이처럼 혁신적인 정책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며 "한국에서라면 집단 반발로 시행하기 어려운 조치들"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조민근 기자, 사진=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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