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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올림픽 추진하면서 엘리트 체육은 안한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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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지난 11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맨 앞줄 오른쪽) 등 체육인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1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맨 앞줄 오른쪽) 등 체육인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스포츠가 갈지자로 걷고 있다. 폭력과 성폭력 파문으로 최근 체육계에 대한 개혁 필요성이 대두한 가운데,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정면으로 맞선 형세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 도종환 장관과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유승민 선수위원은 13일 스위스로 출국했다. 이들은 15일 스위스 로잔 IOC 본부에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김일국 체육상을 대표로 한 북한 체육계 관계자들과 내년 도쿄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과 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 유치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도종환·이기흥·유승민 로잔행 #IOC와 남북 단일팀 논의 예정 #2032년 서울·평양올림픽도 추진 #정부·체육회 개혁 방법 놓고 갈등

한국 체육계를 대표하는 이들 3명의 동행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체육계 개혁 방안을 놓고 정부와 체육계가 사실상 ‘적군’으로 대치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올림픽 남북 공동 유치와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 등을 놓고 IOC에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한체육회 선수위원장이자 국내 유일의 IOC 위원인 유승민 위원은 갈등하는 양측 사이에서 산적한 사안들을 조정해야 하는 난감한 입장이다.

13일 스위스로 떠난 도종환 문체부 장관. [연합뉴스]

13일 스위스로 떠난 도종환 문체부 장관. [연합뉴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소년체전 폐지 ▶국가대표 선수촌 개방 ▶병역 및 연금 혜택 축소 등 사실상 ‘엘리트 스포츠 포기’를 선언했다. 이기흥 체육회장은 11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열린 체육회 대의원총회에서 작심한 듯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앞뒤가 안 맞는다”며 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 일부 대의원은 “외압에 흔들리지 마라”며 박수를 보냈고, 체육 관련 5개 단체는 장외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했다.

이날 오전 열린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도 문체부 장·차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체육 주무부처인 문체부 장·차관이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 동시에 불참한 건 2009년 이후 10년 만이다. 도 장관은 다른 일정을 이유로, 체육 담당인 노태강 문체부 2차관은 체육계 개혁안을 논의하는 스포츠혁신위원회 회의에 참석을 이유로 각각 불참했다.

13일 스위스로 떠난 유승민 IOC 선수위원. [뉴스1]

13일 스위스로 떠난 유승민 IOC 선수위원. [뉴스1]

정부도, 대한체육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건 마찬가지다. 특히 체육회를 바라보는 외부 시각이 비판적이다. 대한체육회는 폭력·성폭력 등 연이은 체육계 문제에 대해 포괄적 관리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다. 그런데도 이기흥 체육회장은 “지금 물러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사퇴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더구나 “국회에서 깎은 예산을 증액해서 체육인 일자리 만들기와 스포츠 클럽 등에 썼다”며 현안과 무관한 치적을 자랑하는 등 웃지 못할 상황을 연출했다.

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인 김상범 중앙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개혁의 대상인 체육회 수장이 사임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무책임한 일”이라며 “국가주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 체육회와 관련 단체들의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스포츠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스포츠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13일 스위스로 떠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연합뉴스]

13일 스위스로 떠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연합뉴스]

문체부의 일관성 없고 독단적인 일 처리도 비판 대상이다. 체육계 비위가 잇따르자 자신들의 관리 책임에 대해선 함구한 채, 체육계만 비리 집단으로 매도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 대책 마련 과정에서 당사자인 선수나 체육 단체의 여론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엘리트 스포츠 포기’라는 중대한 정책을 결정해버렸다. 그런 가운데 지구촌 엘리트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을 2032년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 개최를 추진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11일 오전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열리는 2019년도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 앞서 대한체육회 경기단체연합회 노동조합원들이 소년체전 폐지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대한체육회 분리 방침에 반대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일 오전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열리는 2019년도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에 앞서 대한체육회 경기단체연합회 노동조합원들이 소년체전 폐지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대한체육회 분리 방침에 반대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체육회가 11일 주최한 전문 체육의 혁신 및 발전 방안을 위한 토론회에 나섰던 김주영 용인대 경기지도학과 교수는 “정부는 한국 스포츠의 목적이 국위 선양이 아니라고 해놓고 며칠 만에 다른 행보를 보인다. 비싼 돈 들여서 시설 만들고 외국인을 초대하는데 우리나라 성적은 부진해서 외국 선수들의 잔치가 되면 누가 좋아하겠나”라고 반문했다.

문체부는 시민단체 등 외부 인사들의 참여 비중을 높여 체육계 개혁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단기간 내에 근본적으로 체육계를 바꿀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김주영 교수는 "중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할 체육 정책을 단시간 내에 졸속 행정으로 바꾸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국가대표 선수를 포함한 각계 각층의 의견을 경청한 뒤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충북 진천선수촌. [사진 프리랜서 김성태]

충북 진천선수촌. [사진 프리랜서 김성태]

문체부와 체육회 모두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증적 대응보다는 장기적인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카디프 메트로폴리탄대 방문 교수인 김정효 박사는 “체육회나 문체부 둘 다 대처하는 방식이 가볍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지지 않는 부분이나 근본적인 부분을 보지 않고 지금 당장의 상태를 어떻게 타개할지만 집중한 건 둘 다 똑같다”며 “한국 스포츠의 구조적인 모순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10년, 20년을 보고 접근하지 않으면 모든 게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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