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벌자"…기업들 설비투자 외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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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금순환동향분석이란 경제의 3대 주체인 기업·가계·정부가 일정 기간 중 어떻게 돈을 마련하고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가를 낱낱이 밝혀주는 것으로 인체에 비기면 혈액순환도라고 할 수 있다.
혈액순환이 잘돼야 건강을 유지하듯 돈이 제대로 흘러야 경제의 체질이 튼튼해진다. 그러나 지난 1·4분기중의 자금순환 동향을 뜯어보면 우려할 점이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우선 기업들의 금융자산투자가 작년동기보다 2백14%나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 같은 증가율은 특히 작년 1·4분기 중에는 기업들의 실물투자가 크게 늘어난 데 따라 금융자산 축적액이 전년동기보다 오히려 45.8%나 줄었던 것과 큰 대조를 보인다.
기업들의 이 같은 금융자산 선호현상은 그 동안 계속된 노사분규와 올 들어 심화된 수출부진으로 경기전망이 어둡자 당초 설비투자를 위해 조달한 돈의 3분의1을 주식을 비롯한 각종 고수익 금융상품에 투자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난 2월 산업은행이 전국 2천5백 여 개의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비투자전망에 따르면 상반기중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작년 동기보다 23.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실제로 1·4분기중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2.1%증가에 그쳤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같은 현상은 작년 자금순환분선에서도 나타났듯이 기업들이 생산활동에 의해 「어렵게」돈을 벌기보다는 주식투자 등으로 「쉽게」 벌어 보겠다는 추세가 올 들어 더욱 뚜렷해지면서 선진국법으로 일컬어지는 산업공동화현상이나 서비스업의 이상 비대 등이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짙게 하고 있다.
자금조달측면에서 봐도 기업부문은 1·4분기 중 금융기관차임이 작년동기의 2배가 넘는 3조6천6백억원에 달함으로써 간접 금융대 직접금융의 비율이 작년동기 39.2대 60.8%에서 올해는 55.3대 44.7%로 역전되는 현상을 보였다. 물론 직접금융의 비중이 이렇게 낮아진 데는 해외차입금을 상환한 것이 큰이유가 되지만 금융기관차임이 당국의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늘어났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개인부문 역시 과소비풍조가 확산되면서 금융자산축적액의 증가율이 88년 1·4분기의 51.9%에서 14.6%로 둔화됐다는 사실은 간단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이로써 1·4분기중 개인의 자금잉여 (금융자산축적-금융기관차입금)규모는 2조6천6백 억 원으로 기업의 자금 부족분(자기저축을 초과하는 투자분) 4조5천3백 억 원을 58.8% 메워주는데 그쳤다.
개인부문의 자금잉여가 기업의 자금 부족분에 미달한 것은86년 국제수지가 혹자로 돌아선 이래 처음이다.
작년 1·4분기에는 개인의 자금잉여 (3조7천7백억원) 규모가 기업의 자금부족부분을 10.8% 초과했으며 87년1·4분기에도 3·8% 초과했다.
본래 개인의 저축증대에 힘입은 금융자산축적액은 기업의 생산자금으로 흘러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올 1·4분기 중에는 개인의 금융자산증가도 미미한데다 기업도 생산적인 투자가 아니라 재테크에 열을 올렸다는 점에서 경제의 「혈액순환」이 비정상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4분기 중 자금순환동향을 금융기관예금 측면에서 보면 은행예금이 계속 위축되는 반면단자·보험 등 제2금융권의 규모는 계속 커진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기업부문의 은행 예금은 1·4분기 중 9천5백8억 원 줄어든 반면 제2금융권 예수금은 1조1천억원 이상 늘어났으며 개인부문 역시 은행권예금은 작년 1·4분기의 3천1백억원 증가에서 올해는 3백44 억원 감소로 돌아선 반면 제2금융권 예금은 작년동기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3조3천7백42억 원에 달했다.
이는 작년 l2월5일 시행된 금리자유화조치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제2금융권을 바로 잡고은행권을 정상화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돼 있었던 점을 상기할 때 금리자유화조치도 당초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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