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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1세대 여성 경영인...이병철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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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별세. [사진 한솔그룹]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별세. [사진 한솔그룹]

1세대 여성 경영인,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승부사….
30일 별세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을 수식하는 말이다. 고인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장녀로, 또 경영인으로 한국 경제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이른 오후부터 후배 경영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가 차려진 직후에는 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기렸다. 이재현 회장과 박근희 부회장 등 CJ그룹 경영진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김준동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등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오후 4시쯤 조문을 마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1929년 1월 30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4남 6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 고문은 대구여자중학교,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가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48년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과 결혼하면서 당시 학칙에 따라 중퇴했다. 50년 한국전쟁 이후 이 고문은 그룹 전면에 나서는 대신 이병철 회장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79년 호텔신라 상임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인으로 전면에 나섰다. 이 고문은 83년 한솔제지 전신인 전주제지 고문에 취임하며 삼성그룹의 제지부문 사업을 맡았다.

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전주제지가 독립한 뒤 사명을 순우리말인 한솔제지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사명은 크다는 뜻의 한, 소나무·우두머리란 뜻의 솔을 더해 만들었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사업이념이었던 ‘사업보국’을 체감하며 자랐던 경험에서 나온 사명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경영인으로 1세대 여성경영 시대를 연 것도 고인의 업적이다. 이 고문은 회사 안팎에서 여성 경영인으로 섬세한 면모를 갖추었으면서도 경영활동에서는 담대한 리더십을 갖췄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98년 외환위기로 그룹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고인은 과감한 결단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한솔제지가 갖고 있던 전주공장을 매각하는 등 적극적인 구조조정으로 위기 탈출의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아버지 이병철 회장. [사진 한솔그룹]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아버지 이병철 회장. [사진 한솔그룹]

이 고문은 범삼성가의 장녀로 가족 간 화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12년 이병철 회장의 장남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측에 7000억원대 상속재산 반환소송을 내면서 가문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건희 회장의 누나이자 이병철 회장의 둘째 딸 이숙희씨가 소송에 참여했고, 이건희 회장의 둘째 형인 고 이창희씨 며느리 가족까지 참여했다. 당시 소송액수만 4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이 고문은 소송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이 고문은 한솔그룹을 통해 "지난 97년 계열 분리로 상속문제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삼성가 맏이로 가정의 화합을 생각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이 고문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도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고문은 2013년 2월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준 1심 재판이 끝나고 "이번 판결로 집안이 화목해지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이 고문의 업적은 문화예술과 여성 경영인 후대 양성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 고문은 어린 시절부터 이병철 회장이 도자기, 회화, 조각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는 것을 지켜보며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안목을 키웠다. 2013년 개관한 '뮤지엄 산'은 이 고문의 역작으로 남았다. 뮤지엄 산은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개관 이후에는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아시아 최초로 4개나 설치돼 관심이 집중됐다.

이 고문이 이사장으로 활동한 두을장학재단은 국내 여성인재 육성에 기여했다. 모친 박두을 여사의 유지를 받들어 삼성가 여성들이 함께 설립한 재단의 어른으로 이 고문은 여성 인재 발굴에 애착을 가졌다.

이 고문의 자녀로는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옥형씨, 조자형씨가 있다. 영결식과 발인은 2월 1일 오전 7시 30분이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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