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정치개혁안을 개혁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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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0년 총선에서는 가수 이정현씨가 부른 '바꿔'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했었다. 당시 유권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정치권에 대한 식상함과 혐오감이 반영된 탓이었다.

각 당은 소위 '젊은 피'등 새로운 인물을 발굴해 이러한 부정적 정서에 대응하려 했지만, 그로부터 4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확 바꿔버리고 싶다'는 유권자들의 정서는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각 당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고 지지 정당이 없다는 유권자의 비율이 절반에 달한다.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권자들이 원하는 대폭적인 정치인 물갈이가 그리 쉽게 실현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확 바꾸자'는 유권자들의 정서

과거에 당선자를 결정하는 건 유권자가 아니라 정당 보스의 몫이었다. 유권자들은 지역당의 보스가 선정한 후보를 맹목적으로 승인하는 거수기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후보가 싫어도 지역주의로 인해 그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그 결과 그동안 정치권은 정치적 소비자의 선택이 제약되는 '독과점적'구조를 유지해 왔다. 특히 영남.호남.충청의 유권자들은 사실상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1당 지배 체제, 즉 독점 구조하에 놓여 있었다.

이제 3金이 퇴장하고 지역주의의 광풍도 잦아들면서, 내년 총선을 통해 보기 싫은 정치인을 '바꿔버릴'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여전한 불공정 경쟁 구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이 경제 시장에서의 경쟁이라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 시장에서의 경쟁이다. 경제에서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이 외부요인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효율적 균형을 이룰 수 없듯이 선거에서 경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유지할 수 없다.

그동안 정치 시장에서 경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지역주의와 현행 선거제도가 결합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갖지 못한 신규 정치세력의 의회 진입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존 지역주의 정당들의 독과점 구조를 유지하는 데 현행 선거제도가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여러 가지 법적 장치가 현역 정치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돼있는 반면 경쟁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예컨대 현행법상으로 현역 의원들은 선거운동 기간이나 방식, 정치자금 모금에 있어 매우 불공정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개혁을 추진해 왔다. 재벌과 노동에 대한 개혁은 시장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었다. 이제 정치 시장에서도 경쟁 메커니즘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례대표제의 확대 도입과 선거제도 개정, 의원수 조정과 선거구 재획정, 공정한 선거 운동을 보장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 정치자금 투명화 등 정치 시장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시급한 사안들이 산적해 있다.

이미 중앙선관위는 전향적인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고 각 시민단체에서도 정치개혁 관련 청원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러나 정치개혁에서 항시 부닥치는 아이러니는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재벌에 재벌 개혁을 맡겨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선거운동 등 현역 특혜는 안돼

실제로 정치권은 현역 의원의 기득권을 해치는 어떤 개혁안에 대해서도 매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아마 선거가 코앞에 다가올 때쯤 각 당은 현역 의원들의 '철밥통'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각 당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실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는 '정치개혁안'을 내놓게 될 것이다.

시민사회가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해야 할 시점이지만 언론은 대통령과의 다툼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소모적인 이념 논쟁 때문에 분열돼 정작 쟁취해야 할 중요한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년에도 우리는 또다시 공허하게 '바꿔'를 노래 불러야 할 것 같다. 우울해지는 것은 그 4년 뒤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의 레퍼토리가 그다지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