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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조영남 선생님이라고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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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두주 전 월간지 '페이퍼'의 편집장 황경신양은 고맙게도 조선일보 칼럼에 내 얘기를 썼다. 문제는 호칭이다. 호칭의 석연치 않음이다. 그녀는 내 이름 조영남 뒤에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원 세상에 내가 선생님이라니 세상이 다 알다시피 나는 그냥 가수다. 오페라나 클래식 가수도 아니고 대중가요 가수다. 나는 생전 선생 직분을 가져본 적도 없고, 더구나 황경신을 가르친 적도 없다.

신문에 실린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보고 사람들이 픽픽 웃는 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이라는 느닷없는 호칭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무지 나이 많은 어른으로 취급할 게 영 끕끕했다.

물론 나는 황양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선의로 그랬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녀가 나를 호칭 없이 그냥 조영남이 어쩌고 저쩌고, 혹은 조영남씨가 말하길 운운 썼더라면 그녀가 막 30대에 진입한 처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경우 보나마나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로 질타를 받거나 황양의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 독자들은 '아하! 저 둘은 친구 정도의 사이구나'하면서 황 처녀를 담박에 50대 후반의 여인으로 우대해주는 끔찍한 우를 범했을 것 아닌가 말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나라의 호칭은 그 자체가 딜레마다. 누구도 그 딜레마를 뛰어 넘지 못한다. 나 역시 황양에 관한 호칭 때문에 고심고심 했다. 그녀 역시 나처럼 나에 관한 호칭 때문에 제법 고심했으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영남씨는 너무 무례해 보이고, 조영남 아저씨는 너무 촐싹대는 느낌이고, 조영남 오빠는 왠지 룸살롱 냄새가 풍긴다. 이런 때는 내가 행여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박사학위 혹은 교수 자격증이라도 따놓았더라면 호칭을 골라 잡기가 편했을 텐데 형편이 여의치 못하니 그냥 모호한 조영남 선생님으로 낙찰봤을 터였다.

언젠가부터 후배들이 나를 선생님으로 부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벌개 가지고 일일이 형으로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정정도 한두번이지 도저히 대세의 흐름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나는 참 억울하게도 황양을 비롯, 만인의 선생님으로 군림하게 됐다.

이런 사태를 미리 짐작, 나는 일찍이 미국생활 7년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용감무쌍하게 존댓말 폐지론을 들먹거렸다가 욕만 엄청 얻어먹고 그만둔 적이 있다.

미국엘 가보니 만고에 편한 게 있었다. 존댓말이 없는 것이었다. 싹 없었다. 그냥 상대방의 이름만 부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국 대학 강의 첫 시간 대부분의 교수는 학생들과 첫 대면을 하면서 칠판에 자기 이름 조영남을 써놓고 '날 부를 때는 그냥 영남아라고 불러라'하며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미국 가정에는 우리식의 엄마 아빠에 해당하는 '맘''대디'라는 호칭이 있음에도 그 당시 부모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가정이 허다했다.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미국의 경우 존댓말의 무용론이 너무 극한을 치닫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에 돌아와보니 여긴 또 존댓말의 구조가 너무도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어떤 사람을 만났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 회장님이라 부를까, 사장님이라 부를까, 선생님이라 부를까. 아니야 행색이 초라하니 아저씨 정도로 깎아 불러도 되겠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말투를 봐 호칭을 정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동방예의지국인가.

예의는커녕 이건 예의의 반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유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거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들이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아! 화려찬란한 직함들! 그 직함 하나로 사람의 품격이 정해지고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삽다리 중학교 총동창회 사무총장도 명함을 내밀며 사무총장님으로 불러주길 부탁한다.

지난주 '삶과 문화'칼럼에 봉준호 감독(직함이 부럽다)이 외국 영화제에 나가 외국인 앞에서 반말했더니 시원하더라는 기사를 읽고 탄력을 받아 한마디 거들었다. 황경신! 다음엔 조영남 오빠 아니면 조영남씨로 해라. 또 한번 조영남 선생님 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

조영남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