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가슴이 뽀송뽀송해지는 시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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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시에 전화하기
강은교 지음
문학세계사

달팽이를 만났습니다. 몇 년만인 지 모릅니다. 아, 물론 실물을 본 건 아닙니다. 아파트와 회사 사이, 아스팔트를 맴도는 처지에 그런 추억과 재회할 수 있겠습니까? 이 책에서, 책에 실린 6월 둘째 주에 읽을 시에서 만난 겁니다.

게으른 글쓰기란 비판이 있을 것을 감수하고 김광규 시인의 시 '달팽이의 사랑' 전문을 인용합니다.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책은 묘합니다. 시집이라 하긴 사설이 길고, 시론(詩論)집 치고는 시가 풍성합니다. 우리 시단에서 손꼽히는 시인인 저자가 토요일마다 한 편씩 읽을 수 있도록 일년치 48편의 시를 고르고, 그 시를 쓴 시인들과 전화며 e-메일 등으로 대화를 나눠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 감상을 돕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시에 전화하기'입니다. 거기에 지은이의 생각을 더했습니다.

'달팽이의 사랑'과 관련해서는, 시인이 장마철 마당에서 달팽이를 보고는 시상이 떠올랐다는 것, 그리고 김광규 시인은 보통 사람이 읽어서 알 수 있을 때까지 10~20회 정도 퇴고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지은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십 년을 바둥거린 시인'과 집 한 칸 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의 모습을 나란히 놓고 "'나'가 '너'가 되는 기적의 순간"이라 경탄합니다. 그러면서 달팽이가 느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2월 셋째 주의 시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도 눈길을 끕니다. 손택수 시인의 작품인데 점심에 라면을 먹다 와이셔츠에 묻은 김치 국물이 소재입니다. 국물 자국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인사하는 줄 알고 상대방이 인사하고 가더라며'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고 맺습니다.

월드컵 열기로 잠 못드는 밤,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 덕에 새롭게 그려진 달팽이랑 김치 국물 이런 것 품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남쪽에 도사린 장마전선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뽀송뽀송해질 겁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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