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이념 순수문학 재평가 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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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80년대 후반 격동하는사회적 상황속에서 이념적 도식화나 상투화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히 문학의 길을 걸어간 작품들이 폭넓게 조명되고 있다.
곧 간행될 『문학과 사회』 여름호는 작가의 「목소리」 로서가 아니라 문학고유의 양식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삶의 관계를 은밀히 모색하고 있는 소설가 김향숙·이인성·서정인, 시인 이성복씨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와중에 뛰어들지 않고 고유의 영역을 어떻게 구체화시키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작품집 『수레바퀴 속에서』등을 통해 중산층의 삶을 주로 다루고 있는 김향숙씨는 목소리가.아니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로서 지배이데올로기와 거기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그렸다. 이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혼돈을 일으키고있는 중간계층의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김씨는 두이데올로기에서 사장될 수밖에 없었던 깊숙한 삶의 구조를 드러낸다. 그러나 김씨의 이러한 심리묘사위주의 작품은 사회구조 파악에 미흡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진형준씨는 김씨의 섬세한 심리묘사는 개인심리에 투사돼 있는 사회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사회구조의 총체적 조망을 도와준다며 오히려 김씨가 개인의 심리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길 주문했다.
이인성씨는 기존 소설양식을 파괴해가면서 이 시대의 새로운 삶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간행된 소설집 『한없이 낮은 숨결』은 그의 이러한 소설적 작업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 소설집에서 그는 한 불우한 마라토너를 매개로 허구와 현실, 작자와 독자·주인공을 넘나들면서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소설적 실험은 이 바쁜 세상에 역사적 책무는 하염없이 방기한채 낭만주의적·과대망상적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힐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우기씨는 이씨의 실험은 기존양식의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허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관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일례로 임씨는 이씨가 소설속에서 전지전능한 작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그리고 허구속의 주인공 3자가 「우리」로서 존재함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들었다.
서정인씨 역시 『달궁』을 통해 소설에서의 사실주의적 요소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시점과 화자를 무질서하게 섞어 처음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물어가면서 작중주인공이랄수 있는 인실이의 삶을 작가가 아닌 인실이가 살게 한다.
이러한 서씨의 작업에 대해 장경렬씨 (서울대영문과교수)는 소설 장르의 기본적 덕목이랄수 있는 작가가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인습에 빠진 기존형식을 깨뜨리는 것은 의의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즉 실험소설이 빠지기 쉬운 비현실성을 극복하고 리얼리즘의 기본 개념을 『달궁』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86년 두번째 시집 『남해금산 을 낸 이래 편편이 연애시편을 발표하고 있는 이성복씨의 시적 작업도 이념의 전달이 아니라 같이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씨는 연애시의 특징이랄수 있는 서정적 일치에도 불구하고 이씨의 시에는 두목소리가 함께 섞여 있음을 지적했다. 즉 나의 목소리와 당신의 목소리, 나아가 시인의 목소리와 독자의 목소리를 겹쳐놓음으로써 독자도 참여할 수 있는 시적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씨의 이러한 작업은 80년대의 끔찍한 상황을 회피하지도, 그렇다고 목청을 돋워 주장하지도 않고 시적형식의 개발을 통해 함께 삶의 깊이와 여백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는데서 아주 소중하다는 평가다.
이와 같이 80년대 격동하는 상황속에서 기존 이데올로기에도, 거기에 소리높여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어느 편에도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문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삶의 관계를 펼쳐보이고 있는 작업들도 이제 추수되어야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개인에 인각된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시대를 뛰어넘을수 있는 문학성에 튼튼하게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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