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닦은 서울-부다페스트 교역노|<코리아로드를 가다>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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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교역로를 열고 문물을 교류시키는 주체는 역시 사람이다.
공견권중에서는 처음으로 우리와 「허교」한 헝가리와도 그간 숱한 사람들이 서울과 부다페스트를 오갔다. 또 무역사무소 개설에 이어 정식국교를 맺은 지금은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서로 상대국의 수도에 상주하면서,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며 오랜기간 동떨어진 길을 걸어온 두 나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오늘날 부다페스트에서 한국인을, 또 서울에서 헝가리인을 접촉하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부다페스트 한가운데를 흐르는 다뉴브강변의 포럼호텔앞에는 항상 태극기가 걸려있고, 포럼호텔의 도어맨들은 한국대사관 사람들이 오갈때면 각별히 친절해진다.
지난해 10월24일 업무를 시작한 상주대표부(Permanent Mission) 시절 이후 한국대사관 사람들은 줄곧 포럼호텔에 사무실을 열고 일을 해오면서 포럼호텔의 가장 중요한 VIP가 됐기 때문이다.
대사관 관계자들말고도 부다페스트에는 이미 무공지사, 삼성·대우지사의 주재원들이 활동하고 있고, 상주는 아니지만 그간 이런저런 일로 부다페스트를 다녀간 한국인들은 상공인·정부관리·가정주부·기자·국회의원·학생, 심지어는 대통령특사까지 합쳐 수백명에 달한다.
물적인 교류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 뒤져도 인적인 교류에서는 속구권중 헝가리가 단연 으뜸인 것이다.
서울에서도 헝가리인들을 자주 접촉할 수 있기는 마찬가지다.
얼마전에도 「페렌츠·사보」헝가리 농무부차관일행이 서울에와 헝가리와인을 소개하는 시음회를 가졌는가 하면, 서울용산의 국제빌딩 19층에 상주하고 있는 헝가리대사관 관계자들은 최근 미언론의 미확인보도에 의해 엉뚱하게도 「정보원」으로 몰려 어이없어 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했다.

<미지보도로 당혹>
그러나 지금과 같은 「떳떳한」 인적교류가 있기까지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왕래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한·헝가리 양국간의 교역노를 열고, 그를 바탕으로 정식 국교관계까지 맺게 한 숨은 개척자들이다.
우리의 대북방 경제교류에서 「공산권1호」를 기록하게된 헝가리와의 그간 인적교류 기록을 더듬어 보면, 과연 이떤 사람들에 의해 이떻게 공산권으로의 교역로가 열렸으며, 또 그 길은 아직도 얼마나 먼가하는 사실들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지금까기 확인할 수 있는 한국인 최초의 헝가리 입국은 82년 1l월8일부터 무공의 홍수표이사(현 KOEX전무)와 홍지선사원(현 고공 특수사업부장) 2명이 사흘간 부다페스트에 들어가 헝가리 상의등 몇몇 기관의 인사들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를 돌이키는 홍지선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무역박람회에 한국상품이 소개된것은 지금부터 17년전인 72년부터였다. 이렇듯 공산권 진출은 한두 사람의 방문이나 몇장의 캐털로그, 몇개의 견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72년부터 코트라 빈 지사등이 서독의 중개상을 통해 「메이드 인 코리아」 조차 지운채 서독 회사등의 이른바 「중립 브랜드」를 달아 한국 상품들을 박람회에 들여보냈고 물론 그런 내막을 헝가리 사람들도 알고 한국상품을 접했다.
82년11월에 처음으로 동독·체코·헝가리를 차례로 직접 들어갔다. 비자는 대부분 서독의 중개상등이 주선해 제3국에서 받았는데 별문제 없이 비자를 받고도 막상 현지에 들어가서는 혹시나 한국인이 관용여귄으로 입국했다는 것이 북한에 의해 외교문제화 될까봐 무척 조심했고, 실제 신변상의 불안감도 어쩔 수 없어 상대국에 신변보장서를 요구했는가 하면 밤새 호텔방의 불을 밝혀놓고 잠을 설치기도 했다.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한국의 코트라 임직원2명은 헝가리의 가장 큰 무역상중의 하나인 스칼라 쿠(Skala Coop)를 방문, 「데미안」사장을 만난다.
현재 헝가리신용은행 총재로 있는 「데미안」씨는 지난해 대우와의 호텔합작건설을 성사시켜 헝가리에서 「올해의 경영자상」을 받기도 했던 영향력있는 인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당시 스칼라측은 우리측에대해 헝가리의 공작기계와 농산문을 구매해줄것을 희망했으나, 그 당장에는 어떤 형태의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뒤인 84년 9월 서울무역박람회(SITRA)에 8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참관했던 「데미안」씨는 「미스터홍」을 잊지않고 찾아 다시 상담을 진행, 85년 1월 사상 처음으로 헝가리산 양파 70만달러어치(약3천t)를 우리가 수입하게된다.
당시 농림수산부등에서는 당연히 이를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대만산 양파도 얼마든지 싸게 사올수가 있는데 굳이 멀리서 헝가리의 양파를 사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역의 특수성」을 코트라가 적극적으로 설득, 결국 헝가리산 양파가 한국을 향해 배를 탔는데, 다행히도(?) 이들 양파는 85년초 신구권 일대를 강타했던 폭설등의 영향으로 운반도중 거의가 썩어버렸다.

<외교문제화 걱정>
이 일을 다행이었다고 하는 것은 썩어버린 양파건을 해결하느라고 코트라와 스칼라측은 두고두고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었으므로, 당시의 양파교역이 1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양측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트라와 스칼라의 관계는 양파건 이후 85년3월 한봉수 당시 코트라사장이 부다페스트에 들어가 한·헝가리 최초의 민간협정인 고려무역(KOTI)과 스칼라와의 업무협정을 맺는 것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양국상공인들을 왕래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스칼라측은 민간차원의 업무협정을 이왕이면 준정부기관차원의 협정으로 올리자고 제안해 마침내 87년12월10일 2명의 코트라 직원이 지사 개설을 위해 부다페스트에 상주하게 됐다.
코트라가 이같은 디딤돌을 놓아가는 사이 선경과 같은 국내 대기업들도 하나 둘 독자적으로 헝가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 83년9월 국내.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선경의 런던 현지법인인 선경UK의 박영수본부장등 12명의 일행이 부다페스트박람회에 참가했다. 물론 코리아라는 이름은 내걸지 못했고 선중UK 명의로였다.
그때부터 헝가리에 발을 들여놓았던 한국 기업이나 기판·사람들의 기록을 간략하게 더듬어보면, 이후 대 헝가리 교역로가 어느 정도의 구색을 갖춰가기까지 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대강의 모습을 알수가 있다.
▲83년 9월 의약품 수출입업체 마성상사 ▲83년 9월 (주)대우 조석기 과장 ▲83년 11월 외무부 구주국장, 코트라빈지사장, 삼성 빈지사장, 선경 구주본부장 ▲84년 12월 김우중 대우회장, 김려대 대한상의이사 ▲85년 3월 한봉수 무공사장 ▲85년 3월 수출입은행이사, 외환은행 빈사무소장, 상공부과장 ▲85년 4월 김중원 한일합섬사장, 국립의료원 의사▲85년 9월 (주)백양대표단▲85년 10월 럭키금성상사 빈지사장 ▲85년 10월 효성물산 프랑크푸르트지사원 ▲86년 이종근 종근당회장 ▲87년 4월 남덕우 무협회장 ▲87년 5월 대농 함부르크지사장 ▲87년 5월 기아산업 차장, 코오롱상사 부장, 현대 프랑크푸르트 지사장, 수출입은행심사부 차장 ▲87년11월 해태상사전무 ▲87년 11월 박능선 삼성물산부사장등 10명 ▲87년 12월 무공 부다페스트지사개설.

<회장단까지 한몫>
이외에도 숱한 사람들이 왕래한 기록이 있지만, 대강 추려본 위와같은 발자취만 보더라도 처음에 무역진흥공사가 조그만 샘을 파고,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의 해외지사 주재원들을 중심으로 하나 둘 시내와 같은 지류를 이루다가 점차 업종도 다양해지고 대기업그룹의 회장단까지로 상공인들의 교류가 격상되면서 본격적인 교역노를 닦게되는 과정을 밟은 것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이처럼 오랜기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에 의해 이제 버젓한 길을 닦아놓았지만 그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교역다운 교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역의 통로를 여는 일뿐만이 아니라, 양국의 산업구조·외환사정·소비수준 등 모든 경제상황이 서로 맞아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험가리 부다페스트의 대무역상들인 스칼라·훙가로텍스(Hungarotex)·리글러 일렉트로닉스(Riegler Electronics)나 그간 헝가리와 가장 오래, 가장 많은 교역을 해온 (주)선경등이 현재 어느정도 수준의 교역을 진행중인지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같은 사실을 바로 알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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