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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평화지대를 지정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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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광주에서는 민주주의.평화.통일 관련 행사들이 집중됐다. 5.18 기념 민주주의.인권 국제학술회의(5월)부터 6.15 민족통일축전 및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정상회의(6월)가 그것이다. 1980년의 비극이 광주를 아시아와 한반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통일의 한 상징으로 승화시켰음이 분명하다. 민주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각각 표징하는 5.18과 6.15가 서로, 또 세계와 만남을 의미했다. 세 회의에 참여하며 필자는 과거 희생이 오늘의 소망 및 세계로 상승함을 목도할 수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는 제주4.3, 한국전쟁, 5.18, 남북 양측의 민간인 학살, 북한 인권 문제 등 비극이 적지 않았던 바 이들 시련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통일을 향한 노력의 역사적 자양분이 돼 왔다.

출발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4.19-부마-5.18-6월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수원(水源)이자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는 비로소 평화와 통일을 향해 남북 분단과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파열하기 시작했다. 북방정책에서 햇볕정책.평화번영정책까지 민주화 1기의 노태우-김영삼, 2기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공존.화해.협력정책은 민주화로 인해 가능했다. 민주화 1기의 냉온(冷溫) 왕래는 첫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2기에는 더욱 뚜렷한 온건방향을 띠었다.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의 바탕은 민주화였던 것이다. 물론 그 거시적 토대는 경제적.심리적 대북 지원과 여유를 낳은 경제 발전의 성공이었다. 남한의 산업화.민주화.평화협력 사이의 절묘한 관계 동학은 공동 번영과 인권 증진, 평화와 통일을 향한 남북의 향후 선택을 명백히 시사한다. 나아가 이는 번영.민주주의.평화 3요소의 선순환 구조를 창출하는, 세계 학문과 현실을 향한 통합이론과 모델이 우리로부터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

90년 필자는 한국전 40주년을 맞아 "6.25 기념을 폐지하자"는 제안과 함께 훗날 북한 당국자들을 만나서는 7.27 전승절을 폐지하라고 촉구했다. 둘 다 진실과 화해를 막는 냉전 적대담론의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근대세계 6위의 전쟁을 치른 우리에게 평화는 절대 명제이다. 평화화는 또한 탈군사화를 통한 인간화.복지화의 요체이기도 하다. 현재 비무장지대(DMZ)는 세계 최근거리에서, 세계 최대병력이, 세계 최첨단무기로, 세계에서 최장기간 대치하는 세계 최고무장지대(MMZ)이다. 21세기에 이런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세계적 비극과 대치에 맞는 평화소망 역시 그러해야 하기에, 세계평화를 향한 평화 발신지로서의 우리의 역할이 절실한 때다. 필자는 그것을 유엔과 유네스코에 의한 세계평화지대(World Peace Zone) 지정운동으로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은 폭력과 무력의 행사는 물론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배치.사용이 금지된 영구평화지대가 된다.

지난 수년간 필자는 국내.북한.해외에서 인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 및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발상을 원용한 세계평화지대의 지정을 주창해 왔다. 그 필요성에 대한 호응은 컸다. 비무장지대가 세계평화지대 1호로 지정되고 이어 팔레스타인.발칸.동티모르 등 세계 전란지역들이 2, 3호가 된다면 평화(지대)는 커지고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그 가슴 벅찬 꿈을, 냉전시대 세계 최대의 전쟁을 치른 이곳 우리로부터 시작하자. 시민단체.정부.언론.학계가 국제 비정부기구(NGO) 및 유네스코와 함께 세계평화지대 제정을 추진하고 동참하자고 호소한다. 5.18과 6.15의 첫 만남을 넘어 한국전쟁 비극-평화 희망의 정점에서 이 평화 비전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