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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의 퍼스펙티브

‘FAANG 자본주의’ 시대, 국가 주도 모델 폐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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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4차 산업혁명과 정부

#1. 다부진 체격의 세계적 공학자는 우울한 말투로 필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털어놓았다. “우리 팀은 실리콘밸리에서 통할 만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울 여의도에서 수만 ㎞의 자율주행 실험을 축적해왔지만, 정부의 촘촘한 규제 장벽을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관료들이 우리 프로젝트에 관심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기존 규제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자율주행 자동차 개발팀과 회사(토르드라이버)가 지난해 한국을 떠나 실리콘밸리로 가게 된 배경을 회고하는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 기초한 #20세기 포드주의 시대와 달리 #FAANG 자본주의 시대에는 #지식 노동 혁신에 사활 걸려 #한국은 자율과 신뢰 형성보다 #국가 주도 발전 모델에 매달려 #정부는 부처간의 장벽 허물고 #플랫폼 경제 대전환 지원해야

#2. 뇌 회로 분야 연구의 세계적 전문가인 젊은 뇌 과학자는 자신 있는 어투로 단정지었다. 금융 시스템뿐 아니라 투표와 정당 정치, 모든 계약의 속성을 바꿔 놓을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블록체인이 정부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가 블록체인의 분산·공유·개방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국가가 블록체인 기술을 부분적으로 써먹거나 이용하기는 하겠지만, 국가가 본질적인 권력을 내놓지는 않을 거다.” (이진형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

기술 혁신의 글로벌 플랫폼을 지향하며 출범한 최종현학술원 행사장에서 필자가 만난 두 명의 과학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과학자들만의 고민은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 기술 대혁신은 정치와 정부의 구조 변동을 촉발하게 된다.

FAANG 자본주의가 바꾸는 정부·정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00년 전 포드자동차가 20세기 자본주의 총아로 떠올랐을 때 포드주의 혁명이 휩쓴 것은 단지 먼지가 풀풀 날리던 거리를 오가던 마차라는 전통적 교통수단만이 아니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표준화된 작업의 생산성 경쟁 등으로 집약되는 포드주의 혁명은 정치 혁명을 불러왔다.

거대한 공장에서 표준 공정에 맞춰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결하면서 조직 노동자로 성장하였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선발 포드주의 국가들에서 전국 노동자 조직은 100년 전 100만 명을 넘어섰다. 포드주의 시대에 경제적 갈등의 중핵은 조직 노동자들과 제조업 대기업의 갈등이었다. 조직 노동자들의 조직에 기반을 둔 진보 좌파 정당들과 보수 우파 정당들의 대립이 선발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를 좌우하기 시작했다. 자본·노동 대립에 기초한 20세기 계급정당 정치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이 시대에 국가는 자본과 노동 세력 사이의 중재와 조정을 위해서 한편으로 복지국가를 확장해왔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 세력 간의 민주적 경쟁의 마당을 제공하는 정치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100년 전 포드주의 혁명이 19세기 귀족정치를 무너뜨렸듯 오늘날 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FAANG)이 이끄는 21세기 FAANG 자본주의는 정부·정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① 이진형 교수의 진단처럼 정부는 블록체인을 정보의 수집·관리 등에만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본질적 권력은 내놓지 않은 채 생존하게 될까? 국가의 생존 방식도 혁신을 주도하는 FAANG 자본주의 국가들과 우리처럼 규제 국가의 유산이 강한 국가들 사이에서 근본적 차이가 벌어질까?

② 국가가 모든 걸 주도하던 발전국가 성공 신화의 그림자가 여전한 우리 정부는 FAANG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토르드라이버와 같은 글로벌 경쟁력 갖춘 혁신적 회사들을 우리는 놓칠 수밖에 없는가?

③ 포드 공장에서 일하던 조직 노동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FAANG에서 일하는 지식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표현되나? 머지않아 이들 플랫폼 제국들이 세계 경제를 지배할 때 정치적 갈등 구조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게다가 이러한 패러다임의 거대 전환에서 아예 배제되거나 탈락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이고 미국의 트럼프 현상인데, 이 노란조끼들의 정치적 미래는 누가 이끌 것인가?

④ 포드 자본주의 시대의 정치를 떠받치던 보수-진보 정당들은 FAANG 자본주의의 본격화와 더불어 사라질 것인가? 포드주의 정치마저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던 우리 정당들에게 미래는 과연 있는가?

기술·정치 공진화와 새 시대

박수용 한국블록체인학회장 서강대 교수

박수용 한국블록체인학회장 서강대 교수

100년만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져오는 이런 질문들에 당장 모두 답할 수는 없다. 기술의 변화에 맞서는 인간의 태도·의지 그리고 우리의 적응력과 실험 정신에 따라 이런 질문들의 미래가 앞으로 수십 년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정될 것이다.

기술과 정치가 공진화(coevolution)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필자는 FAANG 시대 기술 패러다임의 한국적 적용에 관심을 기울여 온 박수용 한국블록체인학회 회장(서강대 교수)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20세기 포드 자본주의와 오늘날 FAANG 자본주의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핵심적 경제 주체의 변화, 이들의 갈등 구조에 어떤 질적 전환이 벌어지고 있나.
"과거 포드주의 경제는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상품·서비스를 공급하는 일방향 경제체제였다. 오늘날 플랫폼 경제는 수요자와 공급자가 협업하는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상호 가치·서비스를 교환하면서 이익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플랫폼 기업들은 예전처럼 생산량을 늘리거나 원가를 절감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참여자를 확보하고 이들 간 상호작용을 극대화함으로써 이윤을 얻는다.

기업뿐 아니라 노동의 변화도 의미심장하다. 포드주의 시대에는 원가와 인건비 절감을 향한 혁신이 중요했다. 반면 오늘날 FAANG 기업들에서는 혁신적 서비스의 제공, 맞춤형 서비스를 위한 데이터 분석 등 지식 노동이 중핵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대규모 노사 갈등보다는 지식 노동의 혁신을 위한 작업 환경 구축이 핵심이다.

포드주의 시대와 구분되는 플랫폼 경제는 중간자의 쇠퇴, 실시간 반응, 글로벌 체제화라는 3대 축이 중심이다. 이는 곧 소비·생산·유통에서 비대면 활동 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 노동은 기계와 인공지능(AI)으로부터 위협받을 뿐 아니라 유연노동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다.”

한국, 과거에 갇혀 플랫폼 경제 대응 못해

20세기 포드주의 시대에 영민한 추격형 모델로 성공했던 우리가 FAANG 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 겪는 진통이 커 보인다. 삼성과 SK의 반도체는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플랫폼 영역에서는 아직 글로벌 강자를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넷플릭스·아마존 등의 한국 상륙이 본격화하고 있다.
"두 가지 요인이 있는 듯하다. 플랫폼 기업의 고유한 성격과 우리 정부의 역할 전환의 한계다. 먼저, 플랫폼 기업의 경우 초기에 충분한 규모의 공급과 수요가 연결될 때까지 죽음의 계곡을 건너야만 한다. 이 계곡을 건너서 살아남는다면 공급이 수요를 눈부시게 확장하고 수요가 다시 공급을 낳는 선순환이 일어나 아마존 같은 거대한 공룡 플랫폼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계곡을 건널 확률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둘째, 플랫폼 경제의 엔진이 자율·신뢰·혁신인데, 우리 정부는 이러한 점에서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다. 플랫폼과 공유경제의 핵심 가치인 신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정부는 다양한 주체들 간의 자율적인 신뢰 형성보다는 여전히 국가가 주도하는 신뢰 구축 모델에 매달리고 있다. 공인인증서가 하나의 생생한 사례이다. 정부가 하향식이나, 일방적으로 신뢰를 제도화하려(공인인증서) 할 때 혁신은 이뤄지기 어렵다. 정부는 초기의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너무나 많은 규제와 표준 등을 4차 산업 분야에 적용해왔다.”

정부는 IT·플랫폼 경제 대전환 지원해야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정부의 노력이 부분적으로 시도되기도 했다. 예컨대 국무총리실이 추진해오던 ‘신산업 우선 허용 체제’와 같은 규제 혁신 노력은 미래지향적 변화 아니었을까. 정부 안에서도 과거와 미래가 어지러이 공존하는 지금, 무엇부터 바꿔야 하나.
"정부는 4차 산업 관련 시장에서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틀을 확정짓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새로운 기술 변화들을 정부가 표준화 규제를 통해서 제어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시장과 기술의 다양성을 허용하면서 시장의 가능성과 문제를 빨리 파악하는 스마트한 정부로 나아가야 한다.”
스마트 정부란.
"횡적 연결과 개방을 통해 지금의 수직적인 부처 장벽을 허물고 IT·플랫폼 경제로의 대전환을 지원하는 일종의 정부 플랫폼이 필요하다. 경제 부처 전체가 혁신경제부라고 부를만한 플랫폼 조직으로 진화해야 한다.  20세기 모델에 갇혀있는 우리 정당 정치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들은 여전히 정당법·정치자금법 등으로 보호받는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또 정당 내부적으로는 권력의 독과점이 여전하고, 시민들의 문화적·정치적 감수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정당들은 조직·자금·권한의 집중에 의존하는 구 패러다임을 완전히 버리고, 소통·참여·공유의 개방형 플랫폼으로 전환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FAANG 자본주의는 100여 년 전 대동강 변에 나타났던 제너럴 셔먼 증기선처럼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의 도래를 상징한다. 그에 적응하는 개방적 태도와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을 어떻게 정비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셔먼호가 들이닥쳤을 때 우왕좌왕하던 19세기 정부와 당파 싸움에 몰두하던 정치권은 우리를 근대 산업화 패러다임의 낙오자로 몰아넣었었다. 이번엔 달라야 한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