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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찾아간 장소는?

중앙일보

입력

“3ㆍ1운동은 한마디로 ‘보국안민’운동이고, 오늘날의 보국안민은 ‘민족통일’이다.”

9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천도교가 신년간담회를 개최했다. 천도교에게 ‘2019년’은 매우 각별한 해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1919년 ‘3ㆍ1 운동’이 10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이정희 천도교 교령은 “그 중심에 천도교가 있었다. ‘3ㆍ1운동’하면 ‘유관순 누나’만 기억하는 세태가 안타깝다. 현상 밑으로 흐르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천도교가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3ㆍ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신년간담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인내천운동연합 위원장 임형진 교수, 이정희 교령, 이범창 종무원장. 백성호 기자

천도교가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3ㆍ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신년간담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인내천운동연합 위원장 임형진 교수, 이정희 교령, 이범창 종무원장. 백성호 기자

3ㆍ1운동은 단순히 일제에 맞서 만세를 불렀던 ‘일회성 운동’이 아니었다. 이 교령은 “상해 임시정부에 있던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귀국해서 가장 먼저 찾은 장소가 어디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다름 아닌 서울 우이동에 있는 의암 손병희의 묘소였다. 의암은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을 잇는 동학의 3대 교조였다. 아울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3ㆍ1운동을 주도했던 33인의 대표이기도 했다.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중앙포토]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중앙포토]

이 교령은 “3ㆍ1운동으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자극을 받고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를 건립했다. 3ㆍ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마련한 범민족적 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천도교에게 있어서는 ‘제2의 동학혁명’이었다. “의암 손병희 교조께서는 동학혁명의 처절한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제2의 동학혁명’은 천도교만의 힘이 아니라, 동학만의 힘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도 손을 잡는 대중적 운동이어야 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개신교에도, 불교에도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의암 손병희는 1918년 8월에 이미 천도교 핵심간부들에게 전국의 대교구마다 등사기 1대씩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훗날 이 등사기로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3ㆍ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번져가는데 큰 힘이 됐다. 이 교령은 “손병희 교조께서 없었다면 3ㆍ1운동도 없었을 터이고, 그럼 상해 임시정부도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런 역사적 맥락을 알기 때문에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 후 우이동 묘소를 가장 먼저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동학혁명의 실패를 통해 '제2의 동학혁명'을 대중적 운동으로 확장시킨 의암 손병희. [사진 국가보훈처]

동학혁명의 실패를 통해 '제2의 동학혁명'을 대중적 운동으로 확장시킨 의암 손병희. [사진 국가보훈처]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 천도교도는 약 300만 명이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는 20만명이었다. 남북 분단 당시에는 300만 명 중 200만명의 천도교인이 북한 지역에 있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천도교의 교세는 치명적 타격을 입기도 했다.

올해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천도교는 북한 천도교인 청우당측과 공동 행사를 추진 중이다. 1월말에 방북해 남북 공동행사에서 북측 천도교인들을 만나 ‘3ㆍ1운동 100주년 공동행사’에 대해 협의할 예정이다. 아울러 ‘3ㆍ1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비롯해 학술대회, 시민선언 발표, 3ㆍ1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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