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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광화문 대통령’이란 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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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문재인 대통령의 ‘광화문 대통령’ 공약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시계추를 돌려보자.

1호 공약이 검토없이 이념에서 나왔다? #구중궁궐 나온다던 ‘환상 공약’ 해명해야

#1 2012년 대선 1주일 전 기자회견장.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종합청사로 이전하겠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나와 국민 속으로 들어가 늘 소통하겠다.” “미국 백악관이나 영국의 총리 집무실을 보라. 늘 국민과 가까이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경호), “종합청사에 있는 부처들이 세종시로 이전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부담은 없다”(예산)란 설명도 했다.

#2 2017년 대선 한 달 여전 토론회.

“난 국정운영에 오랫동안 참여했다. 그 성공과 실패를 통해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안희정 후보가 이의를 제기했다. “광화문 대통령, 잘 들었다. 근데 청와대 경호실과 관련법들은 어떻게 하려 하나?” “다시 한번…”(문재인) “청와대 경호실법도 바뀌어야 할 텐데.”(안희정) “경찰로 이관해 경찰청 경호국을 신설하겠다.”(문재인)

#3 취임 3주 후.

대통령 산하 국정기획 자문위원회는 “청와대 경호실을 폐지하고 경찰청 산하로 이관하는 공약은 이번 정부조직개편에서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인적·물적 토대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4 지난 4일 유홍준 ‘광화문 시대위원회’ 자문위원 회견장.

“영빈관·본관·헬기장 등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 대통령도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경호와 의전이라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오히려 시민들의 (광화문) 광장 접근성을 떨어뜨린다.”

복기해 보자.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부터 그려왔던 구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10년 넘게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바로 경호실의 경찰청 이관 약속을 뒤집었다. 애초에 ‘뜻’이 없었던 것 아니냐는 상식적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는 문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 위원이 밝힌 취소 이유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게 된다. 먼저 부지확보. ‘1호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빈 땅이 없는 걸 몰랐다고? 마치 교통정책을 입안하며 “출퇴근 시간에 길이 막힐지 몰랐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경호·의전도 마찬가지. 종합청사로 집무실이 들어가면 광화문광장이 경호구역이 된다는 건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제5조에 다 나오는 얘기다. 청와대 지하벙커, 헬기장 등도 2012년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다. 이를 이유로 공약을 철회하는 데 근 2년의 검토가 필요했다는 것도 우습다. 두 달, 아니 이틀이면 알 일이다. 세금이 아깝다.

박지원 의원은 6일 “(문 대통령이) 지키려고 공약했다고 믿는 정치인도, 국민도 극소수였을 것”이라고 했다. 지키려고 공약한 게 아니니 문제 삼을 일 아니라는 박 의원의 말 자체가 기가 찰 노릇이지만, 성사엔 뜻이 없던 기만극이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유 위원은 회견에서 “(공약 발표 당시) 실무적 검토를 했다기보다 소통 강화라는 이념적 취지였던 것 같다”고 했다. 일국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이 어떻게 그냥 이념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정당화하고, 눈감는 순간 우리는 다음 대선에서 또다시 수많은 ‘이념 공약’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내일(10일) 기자회견에서 반드시 문 대통령의 진솔한 해명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나저나 취임 3년 차에 들어가는데 대통령의 생중계 공식 회견이 이번으로 ‘세 번째’라니, 소통 강화고 이념이고 말할 계제도 아닌 듯하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