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 만에 우승, 두 줄 버스 수비 뚫어라

한국이 아시안컵 1차전에서 필리핀의 밀집 수비에 막혀 진땀승을 거뒀다. 필리핀 수비수 사이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이재성(가운데)과 황의조(오른쪽). [연합뉴스]

‘골문 앞을 가로막은 대형버스 2대를 뚫어라.’

아시안컵 1차전서 드러난 문제점 #FIFA랭킹 116위 필리핀에 1-0 승 #볼 점유율 80%에도 수비 못 뚫어 #남은 2경기 상대도 밀집수비 유력 #손흥민식 과감한 돌파·패스 절실

2019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59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받아든 숙제다.

8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알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조별리그 C조 1차전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바다. 한국은 이날 필리핀을 1-0으로 꺾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3위라는 게 무색할 만큼 116위를 상대로 진땀승을 거뒀다.

한국을 상대로 5-4-1 포메이션을 꺼내든 필리핀의 에릭손 감독. [뉴스1]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사령탑을 지낸 스벤 예란 에릭손(71·스웨덴) 필리핀 감독은 5-4-1 포메이션을 꺼냈다. 먼저 수비 3선에 5명을 일렬로 세웠다. 그 앞 2선에 4명을 세워 두 겹의 방어벽을 만들었다.

마치 골문 앞에 대형버스 2대를 주차한 듯했다. 실제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이런 수비 전술을 가리켜 ‘Park the bus’라는 표현도 쓴다.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 종종 쓰는 전략인데, 지난해 6월 러시아 월드컵에서 아이슬란드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이 전술을 써 1-1 무승부를 끌어냈다.

한국-필리핀전 히트맵

한국은 필리핀전에서 무려 80.7%의 볼 점유율을 기록했다. 한국 골키퍼 김승규(29·빗셀 고베)를 뺀 나머지 선수 21명이 필리핀 진영에 머물다시피 했다. 히트맵(활동량이 많았던 지역을 고온으로 표시한 지도)을 보면, 필리핀 진영의 경우 페널티 박스 안이 붉게 물들었다. 필리핀 선수들은 거의 자기 진영에서 뛰었다는 뜻이다. 한국은 필리핀의 ‘질식 축구’에 고전했고, 어렵사리 한 골을 넣는 데 그쳤다. 경기 후 에릭손 감독은 “우리도 잘 싸웠다”며 승장인 양 만족감을 표시했다.

파울루 벤투(50·포르투갈) 감독 부임 이후 한국은 지난해 9월 당시 FIFA랭킹 12위 칠레와 득점 없이 비겼다. 그 다음 달인 10월에는 FIFA랭킹 5위 우루과이를 2-1로 꺾었다. 세계적인 강팀을 맞아 선전했던 팀이 오히려 약팀을 만나선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이다.

1차전에서 맞붙는 중국과 키르기스스탄. [AP=연합뉴스]

한국은 12일 오전 1시(한국시각)에는 키르기스스탄(FIFA랭킹 91위)과, 16일 오후 10시 30분 중국(76위)과 차례로 조별리그 2, 3차전을 치른다.

1차전에서 중국에 1-2로 진 키르기스스탄이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C조 최강자인 한국을 상대로 비기는 전술을 쓸 가능성이 크다. 1승을 챙긴 중국도 한국과 맞서기보다는 승점 1점을 따는 쪽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은 조별리그 남은 두 경기에서 극단적인 수비 전술, 심지어 ‘텐백’(골키퍼를 뺀 필드플레이어 10명이 모두 수비를 하는 전술)을 뚫어야 할 수도 있다.

한국 축구는 그간 극단적인 전술로 나온 상대에게 고전했다. 일부에선 “‘텐백’은 답이 없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축구 분석업체 ‘팀트웰브’의 분석을 보면 한국은 필리핀의 약 6배인 628개의 패스를 시도했다. 그 중 크로스 패스는 34개였지만 침투 패스는 3개뿐이었다. 바로 침투 패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신태용 전 대표팀 감독 겸 JTBC 해설위원은 “볼 터치가 길면 상대 압박에 시달린다. 상대 수비 뒤쪽으로 한 템포 빠르게 침투 패스를 찔러, 수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측면 돌파 후 문전으로 침투하는 선수에게 방향을 바꿔 크로스를 주는 ‘컷백’을 시도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후반 22분 결승골 상황이 그랬다. 이청용(31·보훔)이 페널티박스 오른쪽의 황희찬(23·함부르크)에게 패스했다. 황희찬이 방향을 바꾸는 땅볼 크로스를 연결했고, 황의조(27·감바 오사카)가 대포알 같은 오른발 강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잉글랜드 토트넘 공격수 손흥민. [토트넘 인스타그램]

결론은 결국 손흥민(27·토트넘)처럼 뛰는 것이다. 손흥민은 최근 소속팀 6경기에서 7골-5도움을 몰아쳤다. 과감한 일대일 돌파, 한 템포 빠른 패스와 슛까지, 전문가들이 얘기한 그대로다. 폭스스포츠 아시아도 “벤투 감독은 손흥민의 창의성이 그리웠을 것이다. 한국은 80%가 넘는 볼 점유율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황의조의 개인 능력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밤을 보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손흥민은 1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그 경기를 치르고, 조별리그 3차전 중국전 직전 대표팀에 합류한다. 장거리 이동에 따른 컨디션 문제로 중국전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성용이 7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9 AFC 아시안컵 UAE 조별 라운드 C조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교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밖에 필리핀전에서 오른쪽 햄스트링을 다친 기성용(30·뉴캐슬)은 회복까지 한 주일가량 걸릴 전망이다. 2차전 출전이 어렵다. 이용, 김진수(이상 전북), 정우영(알사드) 은 옐로카드를 받았다. 한 차례 더 받으면 8강전까지 출전할 수 없다. 준결승전 직전 앞선 경고 또는 퇴장기록 삭제한다. 귀한 승리는 챙겼지만 큰 상처를 입은 한국, 59년 만의 우승을 위해선 더욱 힘을 내야 한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