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순천 촌놈 짠의 거시기한 한국 사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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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요한 지음, 생각의나무, 292쪽, 1만원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지구의 중심은 순천인 줄 알았고, '우주의 중심' 역시 순천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순천은 지금도 내 마음의 중심이다."(30쪽)

1959년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어보다 한국말을, 그것도 호남 사투리를 먼저 배웠다. 지금도 고향 사람들을 만나거나 조금 흥분이라도 하면 "아따, 긍께 거시기 왜 안있냐"하는 사투리부터 튀어나온다. 바로 "내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기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의료센터 소장이다. 존 린튼이라는 미국 이름이 있지만 인요한으로 더 많이 불렸고 그보다는 어렸을 적 순천 사람들이 붙여준 '짠(John)'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은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자신을 '전라도 순천 촌놈'이라고 소개하는 '한국 사람' 인요한이 부르는 '한국 예찬'이다. 이 푸른 눈의 미국인이 "나를 키운 8할은 한국 사람들의 뜨거운 정"이라고 털어놓는 이유는 뭘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그것도 모자라 북한을 17차례 방문해 약 15만명의 결핵 환자의 완치를 도운 까닭은?

그가 그렇게나 한국 사람들에게 갚고 싶은 '사랑의 빚'이란 무엇일까. 지은이는 순천 골목길을 누비던 개구쟁이 '짠'이 한국의 응급의료시스템에 관심을 가져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보급하고 북한을 돕는 구호활동에 나서기까지 40여 년의 이야기 보따리를 진솔하고도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철 들어 대전외국인학교에 다니게 됐을 때의 외로움과 고통, 연세대 의예과 1학년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현장으로 달려가 시민군과 외신기자들 사이의 통역을 자처한 일,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추방 위기에 놓이자 "한국과의 인연이 이대로 끊기는 게 아닌가 하는" 절박감에서 교제하던 치의예과 학생과의 결혼을 서두른 일, 친구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싶어 미 대사관에 건의해 문무대에 입소한 일….

미국인이지만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한국의 젊은이로서 치열하게 시대를 살았던 사연들을 접하다보면 어느새 지은이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된다. 특히 그의 한국에 대한 '숙명에 가까운' 사명감이 대물림된 것이라는 사실은 책 읽기를 더욱 흥미롭게 해준다. 알려져 있다시피 지은이는 111년간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어온 린튼 가문 출신이다.

1895년 제물포항에 도착, 훗날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다. 북한 원조와 관련해 유진 벨 재단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터다. 20대 초반에 한국으로 건너와 48년에 걸쳐 의료와 선교 활동을 펼쳤던 윌리엄 린튼(인돈)이 할아버지이고 전남 지역을 거점으로 500개가 넘는 교회를 세운 휴 린튼(인휴)이 아버지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도 결핵 퇴치에 일생을 바쳤다. 한국에 살고 있는 별난 외국인의 그저 그런 '아이 러브 코리아'가 아닐까 했던 첫 인상을 보기 좋게 깨뜨리는 책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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