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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청소년은 억대연봉 CEO도 될 수 있어…미래수입 산정때 무직자 취급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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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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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해 매년 성적장학금까지 받으며 의대를 다녔던 A씨. 하지만 그가 본과 1학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대법원은 “A씨의 장래 기대 수입은 일반 도시 일용노임(일용직 노동자 임금)과 같다”고 판결했다. 의사가 아닌 일용직 노동자 임금이 적용된 이유로 당시 재판부는 “A씨가 의사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없기에 도시 일용직 노동자 임금을 기준으로 한다”고 밝혔다.

미성년자·학생, 장래 '무직자' 취급 받아 #법원 "청소년 장래는 '가능성' 고려해야" #초등학생때 사고당한 전문대생 기대 소득 #월 235만원에서 월 310만원으로 높여 판결

1991년 판결이지만, 최근까지도 법원은 이 같은 판례를 기초로 미성년자나 미취업 학생의 일실수입을 산정해 왔다. 일실수입이란 다치거나 사망하지 않았을 경우 한 사람이 일해 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입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피해 청소년과 학생들은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직자로 가정됐다. 이 때문에 피해 청소년과 미취업 학생들의 일실수입 역시 무직자의 임금 범위에서 정해졌다.

법원 "청소년은 장래 연봉 수억원의 CEO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해당 기준을 바꿔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3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7부(부장 김은성)는 “청소년의 장래 기대 ‘가능성’을 고려해 일실수입을 산정해야 한다”며 “청소년 피해자는 변호사나 공인회계사가 될 수도 있고, 연봉 수억원을 받는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도 있다”고 판시했다.

지금까지 법원은 청소년의 미래 가능성을 ‘무직자’로 한정했는데, 이제 억대 연봉의 CEO까지 열리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그간 청소년이나 학생 피해자는 자신은 별 잘못이 없어 피해를 봤는데도 ‘당신은 무직자와 마찬가지로 평생 보통 인부의 도시일용노임 상당액의 수입만을 평생 올렸을 것’이라는 평가로 재단됐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판결은 2010년 초등학생이었던 B씨의 교통사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비롯됐다. 2010년 11살이던 B씨는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치여 안면 골절과 타박상 등을 입었다. B씨와 가족은 택시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심 재판부는 그간의 판례와 마찬가지로 일용직 노동자 임금을 판결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7부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진학률에 의해 가중 평균한 학력별, 전 경력 평균 소득을 일실수입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B씨가 요구하는 손해배상액도 모두 인정했다. B씨 측이 요구한 손해배상액이 법적으로 따졌을 때 B씨의 일실수입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학력별 통계소득 적용해야…단, 남녀 임금격차는 인정 안해"

재판부가 삼은 일실수입의 새로운 기준은 무엇일까. 일단 재판부는 진학률과 학력에 따른 평균 통계소득을 근거로 삼았다. 초·중학교가 의무교육인만큼 고등학교 졸업을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동자의 임금을 기준으로 삼았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사고를 당했다면, 최소 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동자의 통계소득은 장래에 벌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의대생 사건을 적용한다면, 이제는 전문직 종사자의 통계소득이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단 재판부는 통계소득에 나타난 남녀 임금 격차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남녀의 임금 격차가 여성 근로자의 기술과 노력, 책임 등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 볼 만한 근거가 없다”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보다 낮은 여성의 통계소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실수입은 남녀 임금의 평균값이 적용됐다.

일실수입에 적용되는 임금도 1년 차 미만이 받는 월급에서 ‘전 경력’이 받는 월급의 평균으로 확대됐다. 그간 일실수입을 계산할 때 장래에 기대되는 월급의 기준은 ‘신입사원의 월급’이었다. 재판부는 “1년 미만의 경력 기간에 상응하는 임금만이 그가 일할 수 있는 기간을 통틀어 계속 벌 수 있는 월급으로 한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며 “전체 경력의 평균 통계소득을 기준으로 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B씨는 1심에서는 월 235만원의 일실수입이 책정됐으나, 항소심에서는 월 310만원으로 상승했다. B씨는 초등학생 때 사고를 당했지만, 판결이 나온 현재 이미 예술전문대학교에 입학한 상태라 고등학교 졸업생이 아닌 전문대 졸업생의 평균 통계소득이 반영됐다. ‘4년제 대학으로의 편입 가능성’도 일실수입 계산에 들어갔다. B씨가 일할 수 있는 ‘가동연한’도 65세까지로 산정했다. 현재 하급심에서 가동연한을 60세로 할지 65세로 할지 엇갈리고 있어,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장래 얼마를 벌 수 있을 것인지 모두 증명하라’라고 한 후 그 허들의 높이를 ‘고도의 개연성에 대한 법관의 확신’으로 설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다양한 가능성을 녹여낸 기준 값을 기초로 판단하는 게 옳다”고 밝혔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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