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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으로 치닫는 한미통상마찰|「우선협상국 지정」앞두고 팽팽히 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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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미간의 통상마찰이 드디어 상대방을 보복하는 전쟁의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두 나라는 5월말로 예정된 미국의 우선협상국 (PFC) 선정을 앞두고 지난 11일부터 3일간 워싱턴에서 김철수 상공부 제1차관보와 「알가이어」 미무역대표부 (USTR) 대표보를 각각 수석대표로 하는 고위 실무진이 포괄분야에 대한 협상을 벌였으나 25, 26일 양일간 다시 협상을 한다는 합의만 했을 뿐 정작 본 의제에서는 한치의 진전도 보지 못했다.

<결국은 지정될 듯>
협상의 최대 난제는 예상했던 대로 농산물시장 개방분야로 한국은 지난 4월8일 발표한 농산물개방계획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고부가가치 농산물인 쇠고기·오렌지·사과·채소·각종 가공식품 등이 이번 조치에서 제외된 데 대해 강한 반발을 나타냈다.
한국은 또 다른 의제인 외국인 투자와 관련해 현재 자본규모가 3백만달러 이상이고 외국인 지분이 50%이상인 외국인 투자는 재무부 인가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앞으로는 자본의 상한선을 폐지하고 외국인 지분율이 50%미만인 경우는 모두 한국은행에서 자동인가토록 하며 이제까지 사실상 수입을 제한하는 역할을 해 온 39개 특별법을 고쳐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양보선을 내놓았지만 농산물로 가로막힌 양측의 첨예한 대림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한 두차례 더 열릴 실무협상은 농산물문제가 타결되지 않는 한 별 다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결국 한국은 우선 협상대상국에서 제외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전망이다.
현재 진행중인 한승수 상공장관의 방미활동, 29일로 예정된 조정부총리의 방미계획, 또는 최근 뻔질나게 드나들며 23억달러의 구매실적을 올린 대미구매사절단의 활약도 그같은 「명백한 예측」을 뒤엎는데는 별 실핵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장관이 방미에 앞서 각료급 통상 「협상」보다는 정부·의회지도자 및 언론 등 여론지도층을 상대로 한 「설득」작업임을 강조한 것도 그같은 우울한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우선 협상대상국 지정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장만한 것은 88년8월 종합무역법을 통과시키면서 비롯된다.
80년이후 줄곧 무역적자·재정적자의 이른 바 쌍둥이 적자로 허덕이던 미국은 결국 3천6백82억달러의 빚을 지는 채무국으로 전락한데다 일본을 비롯한 한국·대만 등 신흥공업국들의 급속한 미국시장진출 확대로 산업공동화 등 위기의식이 만연하자 무역수지 개선과 산업경쟁력 제고로 미국경제를 다시 일으킨다는 목표 아래 84년 성안된 통상관세법을 손질해 종합무역법을 마련했다.
이 법의 핵심은 이른 바 슈퍼301조로 불리는 조항으로 각국이 관세·비관세무역 장벽 등으로 미국의 무역 또는 투자에 손실을 입혔을 경우 우선 협상대상국으로 지정, 이를 제거 또는 보상조치토록 하고 만약 응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보복조치를 의무화한 내용이다.
이 조항의 더욱 가공할 내용은 보복조치권한을 대통령에서 USTR로 이관, 보복조치를 할 때 『미국의 방위전략상 곤란하다』는 등의 정치적 고려 가능성을 배제, 보복조치를 반드시 하도록 한데 있다.

<당초 일본이 타깃>
이 법은 당초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올리고 있는 일본을 주요 타깃으로 했지만 전체 물량의 4O%가량을 미국에 수출, 정년 95억5천3백만달러, 88년 86억4천7백만달러의 대미무역흑자를 낸 한국도 예외일 수 없었다.
미국의 개방압력이 가중되면서 이미 우리나라는 85년이후 미국의 관심 품목을 중심으로 수입개방정책을 꾸준히 추진, 전체수입 개방률을 85년 87.7%에서 86년 91.5%, 87년 93.6%, 88년 94.7%로 올려놓았다.
현재 공산품 수입개방률은 99.5%로 완전개방에 가까우며 농수산품 개방률은 71.9%로 이번 4·8조치에 의해 연말까지 76.1%가 될 전망이다.
또 종합무역법 통과 이후 항목별 현안타결에 나서 보험·지적소유권·담배·영화·광고· 포도주·섬유·철강 등에서 괄목할 만한 개방조치를 단행했다.
보험은 미국회사에 화재보험 풀 참가를 허용했고 이어 유자격 미국회사에 대한화재 및 생명보험 진출을 허용했다.
지적소유권은 저작권법 및 특허법 개정을 통해 외국인의 권리보호를 강화하고 연초부터 위반사범에 대한 형사처벌 등 강력한 행정단속을 펴고 있다.
담배는 수입상의 직접 수입배분을 허용했으며 내외산에 대해 똑같이 갑당 3백60원의 담배소비세를 부과토록 해 차별을 없앴으며 잡지광고·소매점 판촉활동도 허용했다.
영화는 90년1월부터 현재 2단계 검열걸차를 1단계로 간소화하고 94년부터는 복사편수 제한도 폐지키로 했으며 광고 역시 90년부터 50%이상 외국인투자를 허용하고 91년부터는 지사 및 자회사 설치도 허용키로 했다.
포도주는 90년부터 완전수입자유화(샴페인·브랜디는 91년개방)한다는 합의 아래 관세율을 현행 50%에서 89년7월 35%, 90년1월 30%로 단계적으로 인하키로 했다.

<개방률 계속 높여>
이처럼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아직도 미국에 불공정 무역관행을 일삼는 나라로 찍히고 있는 것은 몇가지 점에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미흑자폭이 급격히 증가해 왔다. 우리의 대미교역은 82년 처음 1억6천만달러의 흑자를 낸 이래 그 규모가 빠른 속도로 증가, 87년에는 95억5천3백만달러의 흑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88년에는 86억4천7백만달러로 흑자폭이 줄긴 했으나 우리 통계로는 확실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 흑자폭이 미상무성 통계로는 오히려 2천8백만달러가 늘어난 것으로 돼 있어 우리 입장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
환율도 마찬가지로 85년9월 플라자회담 이후 88년말까지 일본 90.5%, 서독60.4%, 대만 43.6%가 절상됐는데 한국은 30.4%로 절상폭이 가장 작다.
이 때문에 한국은 인위적인 환율조작국으로 지목되어 포괄 협상과는 별도로 환율 협상을 벌여야 할 판이다.
불공정무역국으로서의 한국이미지는 행정부·의회보다는 민간기업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강하다.
USTR가 포괄적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에 앞서 미국내 39개 경제단체·기업들로부터 접수한 불공정무역관행에 관한 의견서에 한국이 21건으로 일본 17건, 대만 8건, EC 7건에 비해 많은 것도 이같은 분위기의 반영이다.
USTR가 오는 30일까지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무역장벽보고서 (DTE)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보고서는 각국별로 수입정책 (관세·수입허가절차·수량제한·통관절차 등)·수출지원제도·정부조달구매제도·서비스시장·외국인투자 제한·지적소유권·표준제도 등 7개부문으로 나눠 작성되었는데 한국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한국만 궁지 몰려>
현재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이 예상되는 나라로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대만·서독·브라질·인도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만큼 궁지에 몰리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게다가 일본·서독은 동렬의 선진국으로 미국의 보복에 상응할 수 있는 보복수단을 갖고 있고, 브라질·인도는 제3세계의 리더그룹이라 미국이 함부로 손대기가 어렵다는 보호색을 갖추고 있다.
브라질은 1천1백50억달러의 막대한 외채를 볼모로 오히려 「해볼테면 해봐라」는 고압적 자세까지 보이고 있을 정도다.
결국은 가장 허약한 한국과 대만이 남게 되는 셈인데 그나마 대만은 중국의 존재를 의식,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미국에 자유무역 협정(FTA)까지 맺자고 나서는 판이어서 우리와는 입장과 자세가 다르다.
이 때문에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한국은 다른 나라들이 조용히 있는 이 마당에 고위실무협상이다, 각료급 방미다, 구매사절단 파견이다 등 숨가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포괄분야와 별도로 진행된 2월21일의 통신분야협상에서 부가가치 통신사업의 개방범위 및 일정, 통신기자재에 대한 관세인하 등이 쟁점이 되어 EC와 함께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되었고 5월30일로 예정된 지적소유권 분야에서도 지정이 예상되며 포괄 분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현재의 로비활동은 『협상대상국 지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라 우선협상대상관행 건수를 가급적 줄여 지정 이후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김철수차관보)이다.
물론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되었다 해서 당장에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정되면 큰 타격>
USTR가 5월30일 우선협상대상국 및 우선협상대상관행을 지정, 공표하면 지정일로부터 21일이내에 불공정 무역관행 조사에 착수하여 이의 제거 또는 보상을 위해 협상을 해당국에 요청하도록되어 있다.
협상시한은 1년 (통신분야는 1년씩 두차례 연기가능)이며 협상대상국은 조사 개시일로부터 3년 이내에 불공정관행을 제거 또는 보상하겠다는 협정을 미국과 맺어야 한다.
이때 대상국이 협정체결을 거부하거나 협상중이라도 미국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면 조사개시 후 18개월이내에 보복조치를 단행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 1년반 또는 3년 이내에 미국과의 쟁점을 해소하면 별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코스트는 엄청날 가능성이 있다.
일단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 여론의 표적이 되면 미업계의 우선협상대상관행시정을 위한 요구가 증폭될 뿐 아니라 여타 부문에 대한 개별적 제소 (기존301조에 의거)도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또 장기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대외적 이미지 손상으로 우리의 적극적인 대외통상정책 수행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우리가 우선협상대상국 지정에서 제외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1차목표를 우선협상국 지정 제외에 두되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우선협상대상관행을 가급적 줄임으로써 지정 이후 USTR와의 협상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잔존 수입제한 공산품을 향후 2, 3년내에 완전개방하고 자유화 유보품목을 조기 예시함으로써 실질적 수입개방을 확대하고 미국관심품목을 중심으로 탄력관세를 활용하며 특별외화대출 (89년 50억달러)을 조기지원함으로써 대미수입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 통상마찰의 소지를 가급적 제거할 계획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양국간에 누적되어 있는 불신과 무지의 벽을 어느 만큼 허무느냐에 있다.
미국의 여론 지도층이 한국이 그동안 취한 개방노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한국 역시 감성적인 반미감정에 의해 통상관계를 다룰 때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종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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