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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가 설 땅 없는 난장판 선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하루만 더 참을걸-』후보자 5명 전원이 탈법선거운동으로 선거관리위원회의 고발을 당한 전례없는 조치가 내려진 직후 한 후보는 이렇게 후회했다고 한다. 이 후보는 엄격한 선거법을 그런대로 지켜보려고 노력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동해시의 다른 모든 후보들이 우리가 오래전 부터 보아온 온갖 타락선거운동작태를 초반부터 보이자 혼자만 깨끗해 본들 돌아오는 것은 낙선의 고배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도 흙탕물에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푸념으로 들렸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타락선거에「동참」한 직후 선관위가 후보전원을 고발했다는 이야기다.
이 후보의 푸념에서 우리나라의 선거운동 양태가 이제 정치지망자들이나 유권자들의 도덕성 문제를 떠나 구조적 문제로 확산되어 있다는 심각성을 읽을 수 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으면 백로는 정치판에서 자연 도태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14일 실시된 동해시 재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든, 선관위가 내린 이번 조처가 끝까지 철저하게 추적되어야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모든 국민은 이번 조치가 우리 사회의 치욕스런 선거관행을 깨뜨리는 신선한 충격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엄정한 사법당국의 심사에 따라 재재선을 다시 치르게되더라도 탈법선거운동이 공정한 처벌을 받는 선례가 나와야 된다.
정신분석학자인「에리히·프롬」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혀있는 사회에서는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그 사회를 병든 사회로 만들어 버린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가 예로 삼은 사회는 나치스하의 독일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정치행태에 있어서는 우리 사회도 그가 지적한「병든 사회」의 범주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막걸리가 맥주로 격상되고 빵봉지 대신 온천행이나 관광여행이 횡행하게되고 문방구에는 봉투가 불티나게 팔리고, 일당2만원·3만원씩 받는 청중들이 예사로 동원되는 선거풍토를 다른 어떤 표현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풍토가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채 앞으로 지방자치제가 실시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온 민주주의는 환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다시「민주주의는 낭비」라는 구실로 권위주의로의 복고움직임이 고개를 치켜들 위험까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권타락선거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금 척결의 대상으로 삼고있는 5공 비리의 뿌리였다는 점이다.
이른바「정치자금」이라는 돈이 대부분 유권자들의 표를 사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넓게 보아 유권자들까지「비리」의 공범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 점을 시인한다면 국민들이 정치권의 비리를 규탄할 수 있는 도덕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속된 말로「쥐약을 먹은 쥐는 물을 찾아가게 마련」 이라는 냉소적 유행어가 널리 퍼져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지방자치단체의 대표든 간에 교과서가 말하는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그들을 당선시켜주는 힘이 정치자금에서 나온다면 그들은 유권자의 권익에 앞서 정치자금을 대주는 세력의 권익을 대변해주게 될 것은 뻔한 이치다. 최근 국회에서 지가공시법안심의 중에서 토지를 많이 가진 계층에 담세율을 높이는 조항이 빠진 채 통과된 예는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입증해 주고있다.
앞으로 실시될 지방의희선거에 지금까지 보아온 금권·탈법선거작태가 이어진다면 그와 같은 현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형태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왜곡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정치문화가 악화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을 말살시킬 뿐이며, 정치인 자신을 포함해 온 국민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제 탈법선거와 거기에 낭비되는 정치자금의 관계는 어느 개인의 도덕성을 떠나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병폐로 확산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구조적으로 백로가 설 땅이 거의 없어져버렸다는 이야기다.
그 구조를 깨는 선례로서 동해시선거에 대해 선관위가 내린 결정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 중진들은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관심할뿐 아니라 연일 현지에 가서「당원단합대회」라는 위장된 명분을 내걸고 마치 선관위의 결정이 없었던 것처럼 탈법선거운동을 조장한 인상이다. 그런 와중에서「후보의 인신매매」라고까지 비아냥을 받게된 공화당후보의 일방적 사퇴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선거 난장판을 해소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자정능력을 정치인에게서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우선 당선부터 되고 보자는 후보들과 당세과시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있는 정당들에 민주정치란 목적보다 정당한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먹혀들 수 없을 만큼 타락선거의 구조는 그들을 얽매어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관위의 고발과 사직당국의 공정한 판단, 그리고 동해시의 선거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시선이 참신한 선거풍토의 확립을 주도하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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