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파병의 결단을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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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노무현 대통령은 고민하고 있다.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는 그로선 벅찬 과제다. 국익과 명분, 과거의 정치적 삶과 현재의 책무가 그의 머릿속에서 충돌할 것이다.

한국은 군사대치 속에 사는 나라다. 평화와 전쟁의 함수관계에 익숙해야 한다. 평화를 어떻게 획득, 유지하는지를 아는 게 리더십의 요체다. 통일 후에도 마찬가지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운명 때문이다. 평화를 지킬 힘도 없이 허망한 반전(反戰)사상에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물들면 국민은 참담한 굴욕과 고통을 당한다. 1백년 전 조선의 비극이 그것이다.

평화는 전쟁의 단순한 반대말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는 군사력의 우위에다 적대세력의 전쟁의지까지 박멸해야 얻을 수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링컨이 체득한 이치다. 盧대통령이 진실로 링컨을 존경한다면 전쟁과 평화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알 것이다.

미국이 전투병을 요청했다. 이라크전 종전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부시 대통령의 인기도 떨어졌다. 일방주의 논란도 커지고 있다.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동맹의 한쪽에서 도움을 부탁하면 나서야 한다. 국제관계는 인간관계와 같다. 쌍방 통행이다. 그래야 한.미동맹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한반도의 평화도 단단해진다.

민주국가는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 그와 함께 여론을 이끌고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게 리더십이다. 한국전쟁 때 북한의 남침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신속하게 미군을 보내줬다. 여론조사는 없었다.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비 문구대로 미국 젊은이들은 이름도 듣지 못한 한국에 왔다. 여론조사가 아닌 리더십의 신념에 의해서였다.

지금 한반도에서 군사적 위급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미국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럴 경우 미국 대통령이 여론조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지원은 힘들 것이다.

한국 내 반미감정의 확산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3만7천명의 전사자를 낸 한국전 참전이 한국에서 평가절하되고 주한미군은 구박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누가 자식과 형제를 보내려 할 것인가.

유엔의 깃발을 들면 파병의 명분은 금상첨화가 된다. 그 정도면 이라크에 가지 않을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깃발이 없어도 대의는 뚜렷하다. 이라크 재건은 후세인 정권의 잔인한 공포정치와 결별하는 새로운 민주역사의 시작이다. 화려한 설득력을 갖춘 명분이다.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권의 고독한 결단이었다. 베트남전을 놓고 미국이 국론분열로 허덕일 때도 그 시절 리더십과 젊은 세대는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혔다.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2백달러인 당시 젊은 세대의 고뇌는 깊었다.

미국 내 반전운동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면서도 경제발전.동맹강화라는 국익에 충실했다. 역사의 감수성은 세련됐고 자기 희생은 돋보였다. 경제발전으로 민주화만 외칠 수 있었던 386세대의 고뇌와는 차원이 달랐다. 베트남전 참전은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였다.

반전을 외치면서도 북한의 핵 공갈은 외면하는 모순 투성이의 친북 좌파적 사고방식으론 꿈꿀 수 없는 시대적 지혜와 상상력이었다.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이 아니다. 이라크의 다수 국민은 쫓겨난 후세인을 증오한다. 겸손한 권력으로 독립투쟁을 주도했던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라크에 가면 베트남에서처럼 한국만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 명분은 건실하다. 경제 실리에다 첨단 전쟁의 노하우에 접근할 수 있다. 평화와 전쟁의 상관관계를 실감할 수 있다. 전투병 파견은 역사의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다.

박보균 논설위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