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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집 '우주 돌아가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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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데뷔한 박라연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당선작이자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시인은 그 후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을 잇달아 펴내면서 활발한 시작활동을 선보여 왔다.

6년이라는 비교적 긴 침묵 끝에 내놓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떤 근원적인 통증을 앓음과 동시에 해소에 이르는 과정을 아주 유연하면서 무르익은 언어로 선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용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품이 그 속엣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데 여기에는 사람과 사람 이상의 삶에 대한 욕심을 다 내어버린 시인의 빈자 같은 마음에서 우선 기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죽은 감나무/뿌리 뽑히지 않는 것만으로도/유배의 갈피에 피고 지는/나팔꽃 박꽃 능소화 그녀들의/웃음소리만으로도/발자국 소리만으로도/배가 부르다/무슨 이름으로 살았는지 알아주는/이 없지만/아침 낮 저녁이 있기에/유령의 식사만으로도 족히/배부르다/죽은/육체에서도 잎이 흔들리는 것처럼/감나무/배고픈 자리마다 꽃을 피워내는/나팔꽃 박꽃 능소화/노지일수록 눈부신 유령들의 화력!/수혈받고 싶어 길게 목을 빼는/참 비위 좋은 사람의 피가 밴/과실인가/제 묘지로 서서도/단내에 값을 매기다니
-「고사목에 핀 유령」전문

시인은 그러니까 알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깨끗한 비워짐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미 태어나고 있는 활발한 낢이라는 것을, 그래서 다 주고도 족히 배부른 것이다. 내가 배고플수록 배부른 영혼들이 세상 곳곳을 밝히고 있으니 만물의 근원인 ‘어머니’로서의 시인은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생겨나는 존재들의 이름이 맨 땅에서 주워 올린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우주가 있고, 그 우주는 분명 어떤 ‘신성한 것’에서 근원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신성하다는 말이 종교적 의미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로 말씀 하소서, 식의 받아들임이 아닌 자기 치유 능력으로 스스로 추구하는 자기 구원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허깨비 같은 날/바다를 치는 다원(茶園)에 가면/초록 물고기 떼지어 운다 울어준다/ 누군가를 품을 수 있는 절정의 순간/잎잎이 제 목을 따는 40만 평의 보성다원/40만 수(繡)의 초록이 되었는지/바다를 이룬 심장이기에 죽음도 어질게 할 수 있는지/저 8*구의 무덤마저 올올이 잎을 문 듯/눈부신 다원/얼마나 많은 저를, 또 얼마나 아득하게 저를,/놓아주었기에 지느러미에 닿는 둥근 죽음의/감촉 이렇게 좋은가/잎의 바다에 누운 저 무덤들마저 여기서는/생사의 경계가 아니다 태아의 시절까지 무사히/헤엄쳐 첫 잎새 머금고 돌아올 수 있다면/내면의 반이 찻잎으로 가득 차서/절반의 몸마저 폭력을 포기할 즈음/초록 물고기가 내 잎으로 우는지/내 잎들이 초록 물고기로/우는지 모른다/모르게 된다
-「초록 물고기」전문

시인은 올해로 등단 16년째를 맞았다. 시 「이슬사다리」를 보면, ‘16년 만에야/서늘한 울음’을 터뜨린 시인이 얼마나 힘들게 입을 열어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케 하는 구절들로 다리를 쌓고 있다. 시인은 말보다 어려운 침묵 속에서 사람이 아닌 자연에다 마음의 녹음기를 틀어놓은 채 그간 시를 써왔던 것이 분명하다. 존함이 ‘우’자 ‘주’자였던 아버지를, 못내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우주 돌아가셨다」란 시를 통해 그제야 껴안을 수 있었다니, 이슬로 쌓아 올린 그 사다리, 알알이 힘없는 맑음이지만 그 겹겹의 눈물, 용서… 세상 그 어떤 철골보다도 단단함을 알겠다. 그게 바로 시라는 것도 더불어 말이다.

■ 지은이 : 박라연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학 석사, 원광대 국문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등이 있다.

■ 정가 : 6,000원

(조인스닷컴 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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