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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엄마 vs 사춘기 딸…서로 부딪히는 놀라운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3)

전 코스모폴리탄 편집장으로 24년간 잡지를 만들었다. 20~30대 여성의 생활과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퇴직 이후부터는 자신의 나이 또래 여성으로 방향을 전환해 콘텐트를 만들고 있다. 그 첫 주제가 '갱년기, 중년여성'이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호르몬의 변동기인 이 시기를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 모색하며 동년배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다. <편집자>

“엄마, 올해 산타 할아버지는 뭘 주실까?” 저녁 식사 중 딸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산타를 믿지 않을 텐데’란 심증은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선물을 왜 나한테 물어봐?” 딸이 심드렁하게 내 눈을 쳐다본다. “엄마가 산타잖아.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건 알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선물이 높여 있는 건 좋더라구. 나한테 필요한 거로 잘 생각해 봐. 작년 선물은 별로였어.” 아, ‘쿨’한 10대다!

30대 후반에 늦둥이로 딸을 낳았다. 그러다 보니 ‘사춘기 딸’에 ‘갱년기 엄마’가 딱 우리 이야기가 되었다. 호르몬이 불균형한 두 여자가 한집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생긴다.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고(‘나도 다 컸거든’), 생각한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짜증이 나며(‘이것도 모르는 거야?’), 몸의 변화가 당황스럽고(‘생리는 귀찮고, 여드름은 속상해’), 안 해봤던 일들에 호기심이 생기는(‘재미있는 게 좋아, 그러니 친구와…’) 딸에 비해 엄마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쉽지 않고(‘지금 이걸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주위의 어려움이 다 나의 이야기처럼 들리며(‘아, 나도 곧 저렇게 될 거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에너지가 떨어진 상태(‘이상하게 피곤하네’)라 의사소통의 방향과 속도에서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1년 정도를 부딪치며 지내고 난 후 내린 결론은, 딸과 나의 이 타이밍이 놀랍도록 적절하다는 것이다.

마침 읽고 있던 책 『중년, 잠시 멈춤』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인 마리나 벤저민은 50세를 앞둔 영국의 저널리스트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폐경과 갱년기를 겪으며 자신과 가족, 지난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전달한다. 개인적으로 반가웠던 건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나이에 딸을 출산했고, 갱년기 대 사춘기 구도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50세를 앞둔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리나 벤저민의 『중년, 잠시 멈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폐경과 갱년기를 겪으며 자신과 가족, 지난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전달한다. [사진 김현주]

50세를 앞둔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리나 벤저민의 『중년, 잠시 멈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폐경과 갱년기를 겪으며 자신과 가족, 지난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전달한다. [사진 김현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요즘 우리가 서로를 잘 비춰준다고 생각한다. 중년기에 접어든 내 몸 또한 놀랍게 변하고 있다. 피부는 쭈글쭈글해지고, 관절은 삐거덕거린다. 딸의 몸에는 호르몬이 격렬하게 밀려드는 반면, 내 몸에서는 호르몬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딸은 잠이 많아졌고, 나는 갑자기 불면증 환자가 되었다. 딸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해내는데, 나는 까맣게 잊는 일이 다반사다. 한편 딸과 나는 둘 다 극과 극의 감정 상태를 오간다.”

저자는 딸과 이런 관계가 되는 이유를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영역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딸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기 위해, 딸 입장에서는 엄마의 아바타로 길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긴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달라지고 있는 시기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나 역시 가지고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중년 여성(특히 폐경의 신호와 함께 호르몬의 변화가 시작된 중년 여성)은 자신을 재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첫 단추는 대부분 가족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가깝고 중요한 관계이니 그곳에서부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중년 여성은 우울감에 빠질 수도, 새로운 단계로 옮겨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갈 수도 있다.

지난 회에 소개했던 '인생 2막, 여자 나이 50'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40~50대 중년 여성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조사한 적이 있었다. 2018년 3월에 개설된 이래 40~50대 여성 3천여명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네이버 카페 ‘우아한 갱년기(http://cafe.naver.com/wgang)’의 게시글을 분석해 이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네이버 카페 &#39;우아한 갱년기&#39;의 게시글을 분석해보니 예상대로 가장 많은 빈도의 글은 가족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 김현주]

네이버 카페 &#39;우아한 갱년기&#39;의 게시글을 분석해보니 예상대로 가장 많은 빈도의 글은 가족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 김현주]

예상대로 가장 많은 빈도의 글은 가족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개인이 느끼는 직접적인 심리상태나 신체적인 변화보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관계에 대한 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자녀에 관한 이야기 빈도가 가장 높았고 남편, 친정과 시댁 순서였다.

카페를 운영하는 유나님은 “회원분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저를 포함한 우리 여성들은 ‘걱정받이’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에 대한, 남편과 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몸으로 마음으로 다 안고 지내는 거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특별히 있지 않아도, 가족들의 고민을 주인공이 되어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죠.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아질 수밖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 카페를 통해 중년 여성들이 조금 더 자신에게 집중할 기회를 가지고, 취미와 사회활동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평택대학교 간호학과 박현정 교수는 논문 '중년여성의 자아존중감과 우울의 관계에서 가족생활만족도의 매개 효과 검증'을 통해 중년여성이 느끼는 가족생활만족도가 우울감과 자아존중감에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가족생활만족도가 높을수록 우울함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자아존중감이 우울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가족생활만족도에 따라 우울감의 폭이 달라진다는 것을 연구결과를 통해 설명했다.

평택대학교 간호학과 박현정 교수는 논문을 통해 중년여성이 느끼는 가족생활만족도가 높을수록 우울함이 감소한다고 발표했다. [사진 Freepik]

평택대학교 간호학과 박현정 교수는 논문을 통해 중년여성이 느끼는 가족생활만족도가 높을수록 우울함이 감소한다고 발표했다. [사진 Freepik]

자아존중감과 우울 등 심리적 요인은 인간관계의 최소 단위인 가족관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만족의 여부 및 그 정도에 따라 밀접하게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중년여성의 우울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가족생활만족도를 증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소위 갱년기의 중년 여성이 예민한 이유는 호르몬의 변화에 따라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 친구, 직업 등 지금까지 인생에서 맺고 있었던 중요한 관계들 역시 바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 후반기를 시작하는 이 시점이야말로 오롯이 스스로에게 집중해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중년, 잠시 멈춤』의 저자 마리나 벤저민은 발달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연구결과를 언급하며 중년 여성에게 필요한 덕목을 제안한다. 에렉슨은 40세에서 65세까지의 성인기 후기를 일곱 번째 발달 단계로 언급하며, 이 시기에는 예술작품의 생산, 아이들의 재생산, 젊은 세대에 대한 지원, 보다 깊이 있는 사회 참여 등 사회에 돌려주는 모든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세대의 신비한 모델’이 되어 ‘이상적인 가치의 전달자’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자아는 고정된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에릭슨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갱년기 여성 역시 또 다른 성장기에 들어선 것이다. 자신에 대해 집중하고, 고민하며, 자라고 있는 10대 딸 아이만큼, 50세를 앞둔 나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주변을 포용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다. 다음 단계를 위한 성장! 딸아이와 내가 이렇게 닮았다는 게 즐거울 따름이다.

김현주 콘텐트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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