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한인 1세기>(1) 한국계 「브류트김」이 쓴 이민사|연해주에 첫발… 처녀지 개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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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현재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 40만은 소련 전체인구의 0·14%에 약간 못 미치는 숫자다. 마치 울창한 삼림속의 1그루나무와 같다.
하지만 꼭 적은 숫자만도 아니다. 소련에 살고있는 1백여 민족 중 숫적으로 29위를 차기하고 있다.
사할린에서, 북카프카즈에서, 시베리아에서, 볼가강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서… 동서 1만㎞·남북 4천㎞의 광활한 땅 소련어디에서나 한인들을 만날 수 있다.
한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구조사의 모국어란에 「러시아어」라고 적는다. 그들이 글을 배운뒤 처음 읽는 시도 「푸슈긴」「네크라소프」「마야코프스키」다.
???김치 여전히 즐겨
타슈켄트의 파흐타코르 축구팀읕 좋아하며 카우난스크의 갈기리스 배구팀의 경기에 열광한다. 우크라이나식 수프를 즐겨먹으며 카자흐식 베시바르마크를 좋아한다. 즐거울 땐 러시아민요 카튜샤를 흥얼거리며 우즈베크민속춤 안디잔폴카를 신명나게 춘다.
그러나 그들은 매년 4월5일 한식이면 만사 제쳐두고 조상의 산소를 찾으며 간장과 김치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음식들이다.
내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이름은 러시아식 이름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할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서 유명한 「브루실로프」장군의 돌격부대에서 활약했다.
할아버지는 마음속에 증조부로부터 들어온 두만강 너머에 남겨두고온 미지의 조국에 대
한 애착을 마음속 깊이 심어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가 30년동안 몸담았던 지역당위원장인 우즈베크인은 장례식때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여 부디 그대의 고향, 고향하늘 아래서 고히 잠들라』고. 우리의 고향, 아! 그 고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1세기가 훨씬 넘는 옛날 조상들은 고향을 등졌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부터 미지의 이국당 러시아를 향해. 그러면 그들을 이국땅으로 내몰았던 회오리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86년 타슈켄트에서 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이 영화제에 북한은 사극 『홍길동』을 출품했다. 이 영화는 조선조중기의 유명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주인공 홍길동이 봉건압제자들과 투쟁하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 ??도국나오자 눈물
내가 이 영화를 거론하는 것은 영화자체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본 소련의 우리 동포들은 아마 마지막 약속의 땅 ??도국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모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장면에서 1세기 전 러시아 땅을 향해 고향을 떠나던 선조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백26년전인 1863년 러시아 극동국경초소 근무일지는 연해주지방에 조선인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이 바로 조선인 이민의 선발대였던 셈이다.
조선인들은 치진헤·얀치헤·수이푼 강가에 정착했다. 그들은 성실하고 근면했다.
제정러시아의 유명한 탐험가 「H·M·프르졔발리스키」는 「조선인의 집단이주가 최근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바람직한 현상중 하나」라고 그의 탐험기에 적었다.
극동지방당국에서도 조선인들을 환영했다. 가뜩이나 노동력부족으로 고민하던 그들로서는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그들은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었으며 특히 뛰어난 농사꾼으로서 솜씨를 보여줬다.
러시아는 조선인들에게 물질적 원조·세금감면의 혜택을 줬다. 조선인들은 러시아인들처럼 인두세 20년간, 토지세 3년간 면제 받았다. 이같은 소식은 즉각 조선에 전해져 더 많은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조선인들 모두가 러시아땅에서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러시아 농민들과 같이 조선인들도 부농의 착취, 관리의 억압과 전횡, 민족적 억압에 시달렸다.
그래도 이주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1894년 한해만도 약1만명의 조선인이 연해주로 건너왔으며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던 해엔 2천명이 국경을 넘어왔다.
그들은 연해주의 광활한 땅위에 집단부락을 형성하고 처녀지를 개척해 나갔다.
1910년 현재 연해주에는 1백여개의 조선인부락에 5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다시 시베리아로, 우랄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갔다.
??? 양잠업 처음 도입
이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었다. 쌀·수수농사를 지었으며 이 지역에 처음으로 양잠을 도입했다. 당시 현지관리들은 상부에 『조선인들 덕분에 엄청난 양의 채소를 수확, 저장이 큰 문제』라고 보고했다.
공장노동자들도 생겨났다. 1906년 연해주지역의 각종 공장에는 약1만명의 조선인들이 일했는데 이는 이 지역 전체 노동자 3분의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이주가 시작된지 10년이 못돼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나타났다. 부농·상인·소기업주 등 유산계급이 전체의 5분의1을 차지했다. 이들 유산계급은 러시아인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주민 동포들을 착취했다.
러시아제국은 이를 이용, 이주민끼리 서로 대립·분열하도록 하는 분할통치정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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