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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영국 총리의 모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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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에게 4일(현지시간)은 잊고 싶은 날이었을 게다. 1시간5분 동안 세 건의 표결에서 내리 졌다. 1978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의회 모독 동의안’도 그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과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에 대한 정부의 법률검토 보고서 전체 내용을 의회에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의됐다. 메이와 사적으로 가까운 이들도 그에게 반란 표를 던졌다.

이날은 그러나 모멸적일지언정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합의안 표결 자체는 11일에 이뤄져서다. 의원들이 다시 한번 자신의 입장-하드 브렉시트든 소프트 브렉시트든-이 채택될 수 있도록 투표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른 이들의 선택까지 염두에 둔 고난도의 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국 BBC방송은 이를 두고 “위가 아래고 아래가 위며 흑이 백이고 백이 흑이며 친구가 적이고 적이 친구”라고 했다.

말 그대로 마키아벨리적 순간이다. 불현듯 『하우스 오브 카드』 속 문장이 떠오른다. 근래 넷플릭스 드라마로 유명하지만 원작은 영국 정치를 배경으로 한 동명 소설이다. 마거릿 대처의 참모였던 마이클 돕스가 1987년 총선을 앞두고 ‘잔인할 만큼 부당하게’ 잘린 뒤 FU(소설에선 프랜시스 어카트)란 이니셜의 정치인이 총리를 몰아내는 얘기를 썼다.

“정치적 우정은 인상에 불과하다. 그것도 쉽게 지워지는 인상.” “충성은 좋은 소식일지 몰라도 좋은 조언이 되는 법은 드물다.” “소문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웨스트민스터(의회)의 복도는 인간도살장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장도 있다. “거의 모든 총리가 난도질당하거나 토막 나거나 피투성이로 내쫓겼다. 여당 의원의 절반 이상이 자기가 총리라면 훨씬 더 잘하리라고 믿는다. 잘렸거나 보직을 맡지 못한 의원들은 총리 뒤에 앉아 뒤통수 칠 기회만 노린다.”

비정한가. 비루한가. 갈등은 그러나 필연이며 정치 행위의 본질이다. 영국 정치가 이토록 난감한 이유는 영국 국민이 그 못지않게 분열돼 있어서다. 그래서 “가장 덜 나쁜 것을 최선인 것으로 간주해 선택하는”(최장집) 과정조차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현실 정치가 때론 더 극적이다. 브렉시트 기한인 내년 3월 하순까진 영국 정치를 보는 게 흥미진진할 수 있겠다. 청와대의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늘어서는 더불어민주당이나, 아직도 친박당 운운하는 자유한국당의 기능 부전 상태보다야 말이다. 우리도 곧 달라지겠지만.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