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쪽지 예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놀라운 생명력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비난이 십자포화처럼 쏟아져도 별무신통이다. “없애겠다”던 국회의 자정 약속은 늘 공염불이었다. 심사 때 슬쩍 집어넣는 ‘쪽지 예산’ 얘기다.

쪽지 예산이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국회가 예산안을 심사하기 시작한 때부터였으리라. 국민이 쪽지 예산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 건 30년 전인 1988년이었다. 당시 예산결산위 계수조정소위(현 예산안조정소위)의 황병태 민주당 간사는 쪽지를 공개하며 “이렇게 많은 부탁 중에 어느 것을 들어주란 말이냐”고 했다. 그러면서도 소위는 상당수 쪽지 예산을 받아들였다. ‘부산신발연구소 설립’과 ‘전주권 개발’처럼 애초 없던 예산이 신설됐다. 이때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정부부처도 쪽지를 들이밀었다. 그해, 그렇게 해서 검사 등의 재판 수당 19억원이 증액됐다.

때론 정부가 강력히 반대해 좌초하기도 했다. 2010년 12월의 일이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발끈했다. ‘대표최고위원 예산반영 목록’이 우수수 깎여서다. 쪽지 예산 9건 1879억원 가운데 ‘노인자원봉사 활성화 사업’(25억원) 달랑 한 건만 살아남았다. 당시 끝까지 버텼던 예산실장이 김동연 경제부총리다. 그는 ‘민주당’이라고 적혀 건네진 호남 지역 고속도로 쪽지 예산도 퇴짜를 놓았다.

매년 수천억원에 이르는 쪽지 예산은 ‘문자 예산’ ‘카톡 예산’으로 전달 방법을 바꾸며 진화했다. 2015년엔 ‘인간 쪽지’가 등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예산안조정소위 위원을 하루 한 명씩 바꾸려고 했다. 이른바 ‘순번제 위원’이다. 쪽지를 전하지 말고 직접 소위에 들어가 희망 사항을 예산에 넣으려는 꼼수였다. 이는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라졌다.

쪽지 예산이 부정청탁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있다. 2016년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기획재정부가 밝힌 의견은 이렇다. “쪽지 예산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반영해 달라는 것으로 그 자체가 부정청탁에 해당한다.” 반면 국민권익위원회의 입장은 어정쩡하다. “예산 편성 과정의 일부여서 김영란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다만 소관 부처에서 김영란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경우 해당 부처의 입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올해도 쪽지 예산은 여전할 것 같다. 회의록을 만들지 않는 소소위에서 예산안을 심사 중이다. “내 앞에서 버젓이 쪽지를 주고받더라”는 국회의원의 장탄식도 나왔다. 쪽지 예산 같은 게 진짜 적폐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