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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조끼에 놀랐나 … 마크롱 “유류세 인상 6개월 유예” 백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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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파리 개선문 안에 설치된 마리안의 얼굴 한쪽이 시위대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마리안상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상징한다. [EPA=연합뉴스]

파리 개선문 안에 설치된 마리안의 얼굴 한쪽이 시위대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마리안상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상징한다. [EPA=연합뉴스]

 “정부 관계자들이 왕처럼 사는 동안 나는 22년을 일하고도 매달 1400 유로(약 176만원)를 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부인이 50만 유로를 들여 저녁 서비스를 바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늘 우리 같은 사람들만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느꼈다.”

프랑스 양극화에 시위 지지 72% #“22년 일하고 월 176만원 버는데 #마크롱 부인은 호화 저녁 서비스” #최루탄에 80대 사망, 사태 악화 #취임 이후 시위로 정책 첫 포기

 지난 주말 전쟁터로 변한 프랑스 파리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시위 중이던 철강노동자 미카엘 드라오는 거리로 나온 이유를 로이터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급격한 유류세 인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에 마크롱 대통령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프랑스 정부는 4일(현지시간) 논란이 된 유류세 추가 인상 계획을 중단하기로 했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이날 생방송 담화에서 “내년 1월 시행 예정이었던 유류세 인상과 전기 및 가스 가격 인상,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강화 조치를 6개월간 유예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필리프 총리는 또 “(정부는) 분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이들과 적절한 토론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정책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이 취임 이후 거리 시위로 인해 정책을 포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크롱은 지난해 대선에서 구체제 청산을 뜻하는 '데가지즘'의 흐름을 타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서민을 외면하고 소통하지 않는다며 본인이 구체제로 지목되는 처지에 놓였다. 거대 노동조합의 파업과 시위로 번번이 개혁 노선을 접어야 했던 역대 프랑스 정부와 달리 마크롱은 양극화의 그늘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층의 분노에 직면해 위기를 맞았다.

노란 조끼 시위대가 정유공장 인근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노란 조끼 시위대가 정유공장 인근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여론조사기관 해리스인터랙티브가 파리의 폭력시위 사태 다음날인 지난 2일(현지시간) 1016명을 상대로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85%는 폭력 시위에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72%가 노란 조끼 시위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90%는 정부의 조치가 사안의 위중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말만 열리던 시위는 월요일인 3일까지 이어졌고, 다른 분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마르세유에선 80세 여성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고 가디언이 보도했다. 시위 현장 인근 아파트에서 창문을 잠그려던 그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에 얼굴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사망했다.

프랑스 전역의 연료 창고 11곳이 시위대의 바리케이드에 막혀 문을 닫았다. 70개 이상의 주유소에 기름이 바닥났다. 브리타니 지역에선 1인당 주유량 제한이 실시됐다.

노란 조끼 시위는 다른 분야로도 번져 파리 거리에서 앰뷸런스 운전자들도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화재가 발생하자 소방관이 끄고 있다. [EPA=연합뉴스]

노란 조끼 시위는 다른 분야로도 번져 파리 거리에서 앰뷸런스 운전자들도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화재가 발생하자 소방관이 끄고 있다. [EPA=연합뉴스]

100개 가량의 고등학교가 학생들의 시위로 봉쇄됐다. 학생들은 마크롱 정부의 교육 개혁 방침에 반발해 교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파리 북부 교외 고등학교에선 차량을 전복시키고 휴지통에 불을 질러 학생 7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프랑스 당국은 전통적으로 고교생의 시위는 급속도로 번져 경계한다.

 폭력 시위는 복면한 소수 극우ㆍ극좌 세력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프랑스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에서 시위에 나선 대다수는 생계난과 상대적 박탈감이 이유여서 마크롱 대통령이 ‘폭력 불관용' 입장을 밝혀도 물러설 조짐이 없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당초 3일 노란 조끼 시위대 대표단과 면담하려 했지만 살해 위협을 받은 시위대 관계자들이 불참해 무산됐다. 초기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인 자클린무라우는 “유류세 동결 조치가 대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시위대는 마크롱이 취임 이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부유세 인하 등 ‘부자 감세'를 시행한 것을 비판하며 유류세 인상이 도시에 살지 못하고 교외로 나가 자동차로 출퇴근 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만 옥죈다고 호소한다.

경찰이 폭력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지만 서민층의 불만이 원인이어서 시위가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AFP=연합뉴스]

경찰이 폭력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지만 서민층의 불만이 원인이어서 시위가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AFP=연합뉴스]

 특히 이들은 마크롱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마크롱은 각종 개혁을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여 ‘주피터'나 ‘나폴레옹’ 같은 별칭으로 불려왔다.

 한 시위 참가 여성은 “국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트럭운전사 쟝 마리 카뮈는 “나는 친환경에 반대하지 않지만, 정부가 유류세 인상을 고집한다면 매주 파리로 갈 것"이라며 “마크롱이 세금을 올리는 정책을 고집한다면 그건 국민에 대한 전쟁 선포”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번 노란 조끼 시위는 1968년 학생과 노동자들이 권위주의와 구체제 청산을 요구하며 벌였던 68혁명 이후 50년 만에 최악의 폭력 사태로 규정되고 있다.

구체제 청산 흐름을 타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롱이 그를 구체제로 모는 시위에 직면해 있다. [AP=연합뉴스]

구체제 청산 흐름을 타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롱이 그를 구체제로 모는 시위에 직면해 있다. [AP=연합뉴스]

 프랑스 국민은 지난해 대선에서 좌우 기성 거대 정당을 몰락시키고 최연소 마크롱을 대통령에 앉혔다. 혁명의 나라 국민이 그런 마크롱에게 “당신도 마찬가지냐”는 의문을 표하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일단 유류세 인상은 잠정 중단됐지만, 반발이 다른 개혁 분야로까지 번진 상황이어서 노란 조끼 시위가 잦아들지 주목된다.

 4일 총리의 담화가 발표된 후, 시위대는 “미흡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노란 조끼 운동의 대변인 격인 벤자맹 코시는 현지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빵을 원한다”면서 그동안 올려온 유류세를 원상복구 하라고 요구했다. 노란 조끼 운동은 오는 8일에도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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