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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인질 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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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을 납치해 몸값을 뜯거나 노예로 팔아먹는 '납치.인질 산업'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래된 돈벌이 수단이다. 2000여 년 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피해자였을 정도다. 기원전 78년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던 그는 해적에게 납치됐다가 친척들이 거액의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석방 즉시 함대를 조직해 해적을 소탕했으며, 사로잡은 잔당을 모조리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납치 범죄는 몸값이나 주고 미봉하면 다시 준동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원칙은 지금도 그대로다. 미국.프랑스.독일 등 서방국가들은 '납치범에게 절대 보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돈으로 인질을 찾아오면 범죄자들이 이에 고무돼 더 많은 납치극을 벌일 수 있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이는 이론일 뿐이고 현실은 다르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최근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세 나라가 이라크에서 납치된 자국민 아홉 명을 구하기 위해 이 원칙을 깼다고 보도했다. 인질 석방을 위해 지난 21개월 동안 들인 돈이 무려 4400만 달러(약 420억원)나 되며, 한 사람을 구하는 데 1000만 달러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국민을 안전하게 구하는 게 우선이고, 원칙을 지켜 재범이나 모방범죄를 막는 것은 나중 일일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어느 나라든 자국민 보호는 어떠한 원칙보다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원칙을 준수한다는 미국 정부도 민간 기업이 피랍 직원을 되찾기 위해 몸값을 내는 것은 묵인한다고 한다.

그러나 당사국들은 "돈을 달라는 요구도, 돈을 준 사실도 없었다"며 몸값 지급을 완강히 부인한다.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 세계에서 시장과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한국에도 이런 딜레마가 이제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4월 4일 한국인 8명과 외국인 17명이 탄 동원호가 소말리아 군벌에 잡혀가더니, 지난 7일에는 나이지리아 가스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 다섯 명이 납치됐다. 위해(危害)는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피랍자에겐 억류 상태 자체가 커다란 고통일 것이다. 동원호 선원들은 이미 억류 두 달이 넘었다. 서둘러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끝에 납치됐던 모든 한국인이 이른 시일 안에 웃으며 돌아오고, 정부 당국자가 씽긋 웃으며 "절대 몸값 지급은 없었다"고 발표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