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in&Out레저] 일본 아키타현 사무라이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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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저택은 집과 정원의 크기만 커졌을 뿐 평민들의 것보다 더 화려하거나 호화롭지는 않다. 사무라이 저택의 대문은 세 곳. 가운데의 큰 문(사진)은 영주가 올 것에 대비해 만든 것이고, 집주인이 출입하는 곳과 하인과 아녀자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다.

담장 중간에 나있는 작은 창은 여자들이 밖을 엿보던 곳이었다. 아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

일본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키타현(秋田縣) 센보쿠시(仙北市)의 가쿠노다테마치(角館町)에 가면 이들을 만날 수 있다. 17세기 에도(江戶)시대에 형성된 이곳은 도호쿠(東北) 지방의 '리틀 교토'라 불릴 만큼 잘 정돈된 도시 구획과 200년 이상 된 무사(武士)들의 저택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350m의 대로를 중심으로 수십여 채의 무사 저택들이 모여 있고 마을 전체를 1500여 그루의 수백 년 된 수양벚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봄에는 장관을 이룬다. 일본 정부에서도 이 마을 전체를 중요 전통 건조물 보조지구로 지정하고 있다.

아키타(일본) 글·사진=신인섭 기자 <inseop@joongang.co.kr>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수양벚꽃의 고향은 수백㎞ 떨어진 교토. 300여 년 전 에도시대의 중심이었던 교토에서 정략결혼으로 시집 온 부인의 향수병을 달래주기 위해 영주가 심었다고 한다. 교토에서 직접 벚나무를 옮겨와 도시 전체에 심어놓고 벚꽃이 필 때만이라도 고향의 기분을 느끼라고. 또 다른 일설로는 떠나는 공주를 위해 교토의 부모가 혼수로 챙겨준 한 그루가 퍼져서 군락을 이루게 됐다는 말도 있다. 아키타현에서는 '벚꽃 의사' 까지 두고 이들 나무들을 관리하고 있다.

신칸센 가쿠노다테역(驛)에서 내려서 걸으면 우리의 읍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소박한 일본 보통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이발소와 채소가게, 꽃집, 우체국까지…. 15분 정도를 걸으면 일반인들과 거주지역을 분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방화지대가 나온다. 무사들만의 상류사회에 도착한 것이다.

우선 길부터 넓어진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의 두 배가 넘는다.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수백 년 된 전나무들과 화려한 수양벚꽃이 시선을 압도한다. 대로를 따라 검은 판자로 된 담장이 양쪽으로 수백m씩 이어진다. 평민과 무사의 구분처럼 무사의 마을 내에서도 신분의 차이는 엄격하게 드러난다.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중에서도 만석 정도의 봉록을 받던 고위급을 지칭하는 말. 각각의 저택들은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무사보다 넓지 않도록 지어야 했다.

사무라이 저택은 집과 정원의 크기만 커졌을 뿐 평민들의 것보다 더 화려하거나 호화롭지는 않다. 사무라이 저택의 대문은 세 곳. 가운데의 큰 문은 영주가 올 것에 대비해 만든 것이고, 집주인이 출입하는 곳과 하인과 아녀자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다. 검은색 판자를 덧대어 만들었다. 담장 중간에 나있는 작은 창은 여자들이 밖을 엿보던 곳이었다. 아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소나무와 전나무, 두꺼운 초록색 이끼들이 맞이한다. 어디선가 칼을 찬 닌자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의 특이한 점은 대문과 반드시 엇갈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무라이는 집 밖을 나서면 7명의 적이 있다'는 속설처럼 언제 있을지 모를 적의 습격에 대비한 원칙이었다. 출입문뿐 아니라 방과 방 사이도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곳은 없다. 집안 내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미로의 퍼즐처럼 꾸며져 있다. 어느 문을 열어야 집 주인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조다.

집안에 들어서서 맨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제단, 일종의 가족 신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투구까지 제단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명망을 날렸던 사무라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혹시 임진왜란 때 조선 땅을 밟진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무사의 방은 반드시 짝수의 다다미 놓인 정사각형이 원칙이다. 다다미 한 장의 크기가 가로 180cm, 세로 90cm. 다다미 두 장이 바로 한 평이다. 한국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으로 따지지만, 일본에선 다다미의 장수로 나타낸다고 한다. 상하의 구별은 집안 내에서도 지켜진다. 하인들의 방은 주인의 방보다 커서는 안 되며 직사각형으로 꾸며진다. 그런데 저택 내에 방이 몇 개가 있는 지는 절대 비밀이다. 사무라이 저택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곳은 단 두 곳이다. 현 시장인 이시쿠로가(石黑家)와 아오야기(靑柳家)도 가장 바깥채의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엔 대대로 전쟁에서 거둬들인 전과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가 자리 잡고 있다.

저택마다 수공예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관광지의 뻔한 토산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가게들은 저마다 역사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17세기 임진왜란의 실패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통일을 완성한 뒤로는 전쟁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무사들의 할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된다. 행정 관료로 편입된 일부 사무라이를 제외하고 중하위급 무사들은 점차 생활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양반과 같이 상류계급의 체통과 명예를 소중히 했던 무사들이 농민들과 같이 농사일을 할 수는 없었다.

몰락한 무사들은 살기 위해 검은색 담장 뒤에다 몰래 텃밭을 일구고, 시장에 내다 팔 수공예품들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대표적인 것이 가쿠노다테의 생벚나무 껍질공예. 생벚나무의 껍질을 얇게 벗긴 뒤 수십 장을 덧붙이고 세공하여 수저, 젓가락, 전통인형 등을 만든다.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볼 수도 있다. 단 사진촬영은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몇 대째 소중하게 이어온 기술을 손쉽게 복제하는 이들 탓이다.

무사도(刀) 대신 조각도를 들고 장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그들이 오늘날 '제조업의 왕국' 일본을 만든 저력은 아니었을까. 사무라이들의 살아있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 가쿠노다테를 찾아봄은 어떨지….

아키타(일본)=신인섭 기자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수양벚꽃의 고향은 수백㎞ 떨어진 교토. 300여 년 전 에도시대의 중심이었던 교토에서 정략결혼으로 시집 온 부인의 향수병을 달래주기 위해 영주가 심었다고 한다. 교토에서 직접 벚나무를 옮겨와 도시 전체에 심어놓고 벚꽃이 필 때만이라도 고향의 기분을 느끼라고. 또 다른 설로는 떠나는 공주를 위해 교토의 부모가 혼수로 챙겨준 한 그루가 퍼져서 군락을 이루게 됐다는 말도 있다. 아키타현에서는 '벚꽃 의사' 까지 두고 이 나무들을 관리하고 있다.

신칸센 가쿠노다테역(驛)에서 내려서 걸으면 우리의 읍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소박한 일본 보통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수십 년은 됐을 법한 이발소와 채소가게, 꽃집, 우체국까지…. 15분 정도를 걸으면 일반인과 거주지역을 분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방화지대가 나온다. 무사들만의 상류사회에 도착한 것이다.

우선 길부터 넓어진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의 두 배가 넘는다.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수백 년 된 전나무들과 화려한 수양벚꽃이 시선을 압도한다. 대로를 따라 검은 판자로 된 담장이 양쪽으로 수백m씩 이어진다. 평민과 무사의 구분처럼 무사의 마을 내에서도 신분의 차이는 엄격하게 드러난다. 사무라이는 무사계급 중에서도 만석 정도의 봉록을 받던 고위급을 지칭하는 말. 각각의 저택들은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무사보다 넓지 않도록 지어야 했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소나무와 전나무, 두꺼운 초록색 이끼들이 맞이한다. 어디선가 칼을 찬 닌자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의 특이한 점은 대문과 반드시 엇갈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무라이는 집 밖을 나서면 7명의 적이 있다'는 속설처럼 언제 있을지 모를 적의 습격에 대비한 원칙이었다. 출입문뿐 아니라 방과 방 사이도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곳은 없다. 집안 내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미로의 퍼즐처럼 꾸며져 있다. 어느 문을 열어야 집 주인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조다.

집안에 들어서서 맨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제단, 일종의 가족 신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투구까지 제단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명망을 날렸던 사무라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혹시 임진왜란 때 조선 땅을 밟진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저택마다 수공예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관광지의 뻔한 토산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가게들은 저마다 역사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17세기 임진왜란의 실패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통일을 완성한 뒤로는 전쟁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무사들의 할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된다. 행정 관료로 편입된 일부 사무라이를 제외하고 중하위급 무사들은 점차 생활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몰락한 무사들은 살기 위해 검은색 담장 뒤에다 몰래 텃밭을 일구고, 시장에 내다 팔 수공예품들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대표적인 것이 가쿠노다테의 생벚나무 껍질공예. 생벚나무의 껍질을 얇게 벗긴 뒤 수십 장을 덧붙이고 세공하여 수저, 젓가락, 전통인형 등을 만든다.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볼 수도 있다. 단 사진촬영은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몇 대째 소중하게 이어온 기술을 손쉽게 복제하는 이들 탓이다. 무사도(刀) 대신 조각도를 들고 장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그들이 오늘날 '제조업의 왕국' 일본을 만든 저력은 아니었을까. 사무라이들의 살아있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 가쿠노다테를 찾아봄은 어떨지….

■ 다다미와 무사의 방

무사의 방은 반드시 짝수의 다다미가 놓인 정사각형이 원칙이다. 다다미 한 장의 크기가 가로 180cm, 세로 90cm. 다다미 두 장이 바로 한 평이다. 한국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으로 따지지만, 일본에선 다다미의 장수로 나타낸다고 한다. 상하의 구별은 집안 내에서도 지켜진다. 하인들의 방은 주인의 방보다 커서는 안 되며 직사각형으로 꾸며진다. 그런데 저택 내에 방이 몇 개가 있는지는 절대 비밀이다. 사무라이 저택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곳은 단 두 곳이다. 현 시장인 이시쿠로가(石黑家)와 아오야기(靑柳家)도 가장 바깥채의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엔 대대로 전쟁에서 거둬들인 전과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가 자리 잡고 있다.

여행정보

■ 일본 동북지방의 아키타,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야마가타, 후쿠시마 등 여섯 개 현은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어 팸플릿과 이정표 등 세심한 친절을 손쉽게 느낄 수 있고, 한류 열풍으로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 굉장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등 항공편은 일주일 내내 열려있다. 북도후쿠 3현 서울사무소.02-771-6191 www.beautifuljapan.or.kr.

■ 일본의 전압은 110V. 디지털카메라나 PC 등을 충전해서 써야 한다면 반드시 변환 잭(일명 돼지코)을 가지고 가는 게 좋다.

■ 아키타현 관광과 www.akitafan.com, 이와테현 관광과 www.iwate.jp/~kan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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