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면의 전환을 주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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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정혼란 등을 명분으로 이 시점에서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실시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갑작스런 결정에 우리는 일단 여야 정면대결의 위험부담을 피하게 된 것은 안도하면서도 이 나라 정치가 장차 어떻게 돌아갈지 우려하는 심정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우선 이 결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가 이처럼 극단적인 선회를 해도 좋은 것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어제까지 동으로 간다고 했다가 하루 아침에 서로 간다는 식의 조치가 나오는 집권세력의 체질과 정치토양을 국민이 어떻게 믿겠느냐는 심각한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노 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여-야 정면대결로 국민투표를 치를 경우의 국력소모와 위험부담을 잘 안다.
국민투표의 경우 신임을 걸든 안 걸든 결과적으로 투표결과에 따라 대통령의 진퇴가 걸리는 것은 피할 수 없고, 그럴 경우 야당이 원치 않더라도 대결구도로 휩쓸려 들어갈 것도 예상되는 일인만큼 때 이른 정권경쟁으로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다.
여야가 조직과 금력을 총동원해 재작년 말의 그 1노3김 대회전을 다시 치르는 과정에서 기성체제의 약화와 붕괴를 노리는 과격세력의 활동이 극렬해지고 심각한 경제적 악영향과 사회적 혼란, 대외적응력의 약화 등 온갖 손실과 기회상실 등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을 수 있는 국민투표의 효과도 지극히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노 정권이 재 신임을 얻어 봐야 여소야대 구조를 변경할 수도 없고 불신임을 당할 경우 수권태세가 의심스러운 야당간에 진짜 대통령 선거가 벌어져 나라가 어디로 갈지 아무도 장담 못 할 국면에 빠져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지금껏 국민투표에 의한 중간평가가 불가피하되 여-야의 정면대결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정국전개는 평민·공화당 등 대결을 원치 않는 야당까지도 대결로 등을 떠밀리는 방향으로 줄달음쳐 온 게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이 시점에서 중간평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이런 위험국면을 피하자는 것으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4월 국민투표를 기정사실화 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위약이니 배신이니 하는 비난을 각오하면서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부담이 크고 문제점이 많다고 하여 중간평가를 단순히 연기 또는 취소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보며 이런 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확실한 대답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우선 지금과 같은 정국표류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점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국회는 5공 청산과 광주문제 등 과거에 얽매여1년이란 세월동안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지내 왔는데 중간평가를 미룬다고 하여 다시 또 그 표류를 계속할 수는 없다.
다소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국민투표를 통해 정국의 국면 전환을 가져오고 표류 정국에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중간평가의 유보가 다시 5공에 묶인 정국의 방황을 계속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권은 이 대목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하며 국민 투표를 않더라도 빠른 5공 청산과 그에 이은 정국전환을 가져올 대안을 지체없이 내야 한다.
둘째, 가뜩이나「나약한 정부」라는 비판을 받은 정부의 공신력을 강화할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간평가라는 공약을 실천한다고 했다가 다시 안 한다고 하는 이런 변전을 거듭하고는 정부의 위신이 설 리가 없다. 그리고 중간평가의 과제를 계속 안고 있는 이상 공무원사회 등에서 정권의 신뢰가 제대로 확립되기도 어렵다. 지금처럼 야당눈치를 보고 사회의 각종 이익 집단의 눈치나 보면서 공권력 확립도 못하고 공무원들을 장악하지도 못한다면 다시 중간평가를 해서라도 새 출발하자는 주장이 안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노 정권은 이점에 관해 확실한 자기중심을 잡아야 한다.
셋째, 여야 관계의 재조정 문제도 시급하다. 국민투표의 대처방식을 둘러싸고 야권 3당의 공조체제에 금이 갔고 정계판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은 것이 사실인데 다시 국민투표를 않기로 함에 따라 각 정당간의 관계설정이 매우 불투명하게 되었다. 영수회담 등 가능한 대화 채널을 모두 가동해 달라진 상황에 대한 정치권의 새로운 인식을 상호조정 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번 결정으로 여-야 정면대결과 파국의 위험을 벗어난 것은 일단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위험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 연기하거나 회피만 한다면 위험은 가중되기 십상이다. 다행히 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을 3야당이 모두 수용하는 입장인 만큼 모처럼 얻은 여유를 제도정치권은 허송하지 말고 5공 청산과 광주문제 등에 속시원한 쾌도난마격의 대국적 결단을 내리고 경제문제·노사문제 등 산적한 당면문제들에 전향적으로 대처해 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앞으로 언제 실시하더라도 중간평가가「위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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