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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 부양의 짐, 가족에게서 과감히 덜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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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승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이승호 복지팀 기자

재산과 소득이 거의 없는 빈곤층 A씨. 그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있을까. 만일 부모가 별다른 수입 없이 기초연금으로 생활하는 65세 이상 노인, 혹은 장애인 연금만으로 살아가는 중증장애인이라면 어떨까. 지금은 국가에 도움을 청해도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기초생활수급자 제도에 적용되는 부양의무자 규정 때문이다. 배우자나 부모·자식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이나 소득이 있으면 기초수급자가 될 수 없다. ‘당신이 빈곤한 건 알겠으나 자식이나 부모가 그런대로 살고 있으니 거기에 손을 벌려라’ 이런 취지다. 아직도 가족 부양을 주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부양의무 제도가 사회 상규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자녀가 빈곤하고, 부모가 65세 이상 노인이라면 어떨까. 자녀를 언제까지 부양해야 할까.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웠는데도 자녀가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하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등의 이유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부모에게 무한정 자녀를 돌보라고 할 수 없다. 부모도 은퇴해서 일정 소득이 없고 월 25만원의 기초연금을 받고 있는 처지라면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축복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고령화 속도를 자랑한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늘고, 80세 넘은 초고령 노인이 급증한다. 이들에게 ‘죽을 때까지 자식을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 부양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2000년 기초생활 보장제를 만들 때 이런 규정을 넣었지만 수명이 다했다는 뜻이다.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과정에서 장애인연금과 기초연금 수급자, 만 30세 미만 미혼모(이혼·사별한 한부모 가구 포함), 시설보호 종료로 아동보호 시설을 나온 만 30세 미만 청년 등에 대해서는 부양의무 기준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빈곤층 부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일은 사라진다. 복지부는 그동안 부양의무제도로 기초수급자가 되지 못했던 약 4만 가구가 생계·의료급여를 지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 가구 중 3분의 1이 1인 가구다. 양극화는 심해지고 고령화는 빨라진다. 부양의무 규정을 지금이라도 완화한 게 다행이다. 성장률이 둔화하면서 부양의무자가 65세 이상 노인이 아닌 경우도 자녀나 부모를 부양하기 쉽지 않다. 부양의무 규정을 좀 더 과감하게 손봐야 할 때다.

이승호 복지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