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濠洲型 세계화를 주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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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참석, 한 현지 기업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여섯 번 정도 한국을 다녀왔다고 했고 반가운 나머지 한국에서 어떠한 사업을 하느냐고 질문했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솔직히 한국 시장에 더 이상 투자할 용의가 없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을 때기로 결정한 원인을 세 가지로 압축했다. 첫째는 일본 다음으로 임금이 비싼 한국에서 더 이상 이익을 볼 수 없다는 점, 둘째는 전반적으로 서비스 개념이 미흡하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외형적으론 세계화와 국제화를 강조하면서도 본인의 경험으로는 한국이 매우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점. 이어서 그는 신규 사업지로 호주를 선정했다고 부연 설명해 주었다.

*** 한국시장이 매력을 잃은 까닭

물론 한 중소기업인의 경험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보다 호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과 4강들의 관계가 우리의 외교와 무역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은 호주를 상기할 때 인기있는 신혼여행지, 비교적 중요한 교역국, 그리고 뉴질랜드와 함께 아태지역에서 유일한 앵글로색슨 나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좀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한국전쟁에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을 파병한 특이한 나라, 그리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대륙국가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호주가 한국의 전반적인 외교안보와 통상관계에 비추어 볼 때 4강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라고 강조할 경우 당장 영국.프랑스. 독일 등의 서방선진7개국(G-7)이 더 중요한 우방이라고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호주의 비중과 중요성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의 1백90여개국 가운데 호주와 한국 간의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매우 많다. 경제 규모(호주의 GDP는 4천9백60억달러, 한국의 GDP는 5천5억달러)가 거의 같으며 한국은 호주의 셋째로 큰 수출 시장이다. 반면 한국의 총 수입 물량 중 호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우디아라비아(5%) 다음으로 다섯째인 3.9%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호주가 표방하고 있는 세계화.국제화 정책이며, 특히 핵심적인 외교안보 및 경제 이익을 매우 개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호주 정부는 호주형 북방정책(Facing North)을 꾸준히 전개하면서 한국.일본.중국.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 그리고 태국과의 쌍무적인 외교.군사 양자 실무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근간으로 5개국 방위협정을 통해 말레이시아.싱가포르와 긴밀한 안보협력을 구축하고 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호주군의 총 병력수가 5만4천명에 불과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걸프전, 9.11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작전, 그리고 제2차 이라크전에 예외없이 전투병을 파병했다는 점이다.

*** 亞太지역 중시 북방정책 펼쳐

물론 현재의 존 하워드 정부가 미국의 대외정책 노선에 지나치게 동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호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국제안보 질서 유지에 동참하는 것이 호주의 핵심적인 국가이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실천하고 있는 유일한 역내 국가다.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에 호주는 북핵 문제를 포함, 한반도 안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호주의 브랜딩(branding)을 정의한다면 아마도 아시아화를 기반으로 한 세계화일 것이다. 영연방의 일원으로 모국(母國)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호주는 이미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전환했다. 호주의 아시아화는 한국의 장기적인 이익과 일치됨은 물론 유사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몇 안되는 국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호주를 핵심적인 파트너로 인식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李正民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