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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아내가 재산 늘리고 관리도 맡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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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정영은씨(38·서울 서초동 삼풍 아파트)는 지난해 10월「기어코」서울 압구정동에 T아동복 대리점을 냈다. 시댁과 친정에서 물려받은 재산에 회사중역인 남편, 공부 잘하는 자녀 등 이른바「모든 것을 다 가진 주부」로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였지만「가정에서의 자신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느끼면서 무력감에 시달려 왔던 것.
한때 이혼까지 절실하게 고려할 정도로 우울증에 빠져들었던 그는 자신의 일감을 찾아 나서기로 작정,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가게를 냈다.
『대학을 마치고 곧 결혼, 가정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막상 사회에 나오니 돈벌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어요. 공연히 남편에게 짜증이나 부리던 일들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정씨는『몸은 고달프지만 잘한 결정』이라며 흡족해 했다.
지난날 돈벌이에 나섰던 주부들의 대부분이 호구지책으로, 또는 가정의 부만을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 주부들은 가족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가사노동대신 돈벌이를 택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는「지위 재생산」이 더 큰 목표가 되고 있다.
80년대 중반이후 두드러진 이 같은 경향은 최근의「증권 붐」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서울YWCA가 조사한「증권투자에 관한 투자자 의식조사」에서 가정주부가 17.9%를 차지, 회사원(28.2%)다음으로 많았으며 투자이유 분석에서 높은 수익성(62.4%), 「많은 상식을 얻는 경험」(47.0%), 「여가시간을 보람있게 보냄」(20.5%)등을 내세웠다.
주부의 경제활동 참여는 자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부터 증권시장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강리나씨(32·서울 연희동)는 그대표적인 케이스. 7세·5세의 1남 1녀를 가진 가정주부로 집안살림과 남편시중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에게 남편은 3백 만원이 예치된 증권통장을 건네주며 주식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요(?)했다. 『나만을 쳐다보며 아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활기 있게 생활하는 직장 여성동료들과 비교가 돼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궁리 끝에 반 강제로 증권통장을 건네주고 다 없어져도 상관 않겠다고 했더니 처음엔 겁내다가 요즘엔 신문도 읽고 투자상담원도 찾아다니는 등 나름대로 열심이에요.』
신형민씨(35·회사원)는『산 주식이 조금만 내려가도 깜짝 놀라 되파는 통에 원금이 오히려 줄어들었지만 자기 혼자서 결정하고 처리하는 아내를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데 힘입어 서울YWCA·한국가정법률상담소 등 여성단체는 물론 금융기관·증권회사·문화센터 등에 재산법·세법 강좌들이 잇따라 개설되는가 하면 전문음식점 경영자 교육과정까지도 생겨났다. 서울 YWCA 프로그램 부 홍정혜 간사는 『전문음식점 경영자 교육은 물론 탁아 모까지 대졸출신 주부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말하고 육아에서 해방된 30대 중반∼40대 초반의 주부들이 금전적으로 평가되지 않는 가사에 허무함을 느끼고「자신을 찾는 작업」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것으로 분석됐다.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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