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제3부|백제불사가 제작한 법륭사불상|법륭사의 불교미술 장충식<동국대교수·불교미술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불심은 무궁한 것인가. 아니면 중생의 염원이 무진한 것이기에 불심 또한 다함이 없는 것인가. 현존 세계최고의 목조건물을 자랑하는 법륭사 오중목탑과 금당으로 들어가는 회랑을 들어서노라면 중생들의 끝없는 불심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여 숙연해지기만 한다. 작렬하는 7월의 무더위로 관람객의 발길도 한결 한가해진 고사의 분위기란 여간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 사찰은 돈황 석굴, 그리고 우리의 토함산 석굴암과 함께 극동의 3대 예술 가운데 하나임을 자랑하는 금당벽화를 지닌 사찰이라는 점에서 보다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법륭사는 백제 계의「소가」(소아)씨 혈통을 이은 저 유명한 성덕태자가 부왕 용명천황의 뜻을 이어 추고여제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왕궁사찰이다. 그 건립 연대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긴 하나 대체로 성덕태자가 이카루카(반구)궁을 지은 추고 9년(601)부터 15년(607)으로 보고 있으므로 607년께 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이때 지어진 절은 천지 9년(670)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가람은 천무조(673∼686)에 완성된 좌전우탑 형식의 서원가람이다.

<동쪽에 약사좌상>
소실이전의 가람을 고초가람이라 하는데 그 형식은 지금과 달리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이며, 주변에 회랑이 돌려지는 사천왕사식 가람배치였다. 현재는 탑의 심초석이 보문원 뒤의 빈터에 남아 있을 뿐이다. 동원가람은 성덕태자의 반구궁이 있던 곳으로서 이곳에는 태자와 관계 있던 예당·몽전·사리 전·대자전이 중심이 되나 역시 대표적 건물은 구세관음을 모신 아름다운 8각 건물인 몽전이다. 이 몽전 또한 천평 11년(739)건립이후 수 차례에 걸쳐 개조되었지만 그런대로 원형에 충실한 팔각원당형의 대표적 건물이다. 이 건물의 기본적 구조는 신라시대 우조팔각부도의 형식이란 점이 주목된다.
오늘날 법륭사의 중심이 되는 중문·금당·오중탑, 그리고 회랑의 일부 등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로서 자랑되고 있는 이들 건축물은 모두 백제로부터 건너간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그 특색이 있다. 특히 금당 내부는 동방·중방·서방으로 나뉘어 중앙에 석가삼존 상, 동쪽에 약사좌상, 서쪽에 아미타좌상을 봉안하는 등 방위에 따르는 불상배치가 주목을 끈다. 이중에서도 중방의 석가삼존 상은 광 배의 조상 명에 의하면 성덕태자의 명복을 위한 제왕·제 신들의 발원으로「도리」(지리) 불사가 제작한 것인데 지리는 백제 계의 불사로서 당시 제일 가는 조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불상은 전형적인 배위 불상 양식으로서 의문의 좌우대칭이라든지 정면 관 위주의 길고 갸름한 얼굴형식 등은 모두 7세기 불상양식의 공통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같은 양식은 원류가 배위 시대 주문석굴 양식에까지 소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식은 당시 한반도 내에서도 크게 유행하던 양식이었다. 그것은 백제의 지리가 금 동으로 재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뒤에 백제관음상과 함께 오늘날 법륭사의 대표적 불상이다.

<소실된 벽화 모사>
금당내부의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렸다는 구전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 이 그림이 담징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교과서에 기록되기까지 한 금당벽화의 제작자는 실제로 정확하지는 않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문헌상의 기록이 발견된 적이 없고, 일본의 책에는 어디에도 담징의 그림으로 소개되지는 않고 있다. 담징(579∼631) 은 당대의 뛰어난 화가이며 동시에 오경을 아는 불교승려이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보면 추고천황18년(610)3월에 고구려에서 증 담징과 법정을 보내 왔는데 성덕태자는 이들을 반구궁에 있게 하였다. 담징은 오경을 알고 채화·종이·먹과 함께 맷돌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담징과 금당벽화와의 관계는 법륭사가 추고 15년 완공 된지 3년 후인 18년에 담징이 도일하였고, 또 그는 채색·지묵을 능작하는 자로서 성덕대자가 그를 법륭사의 태자궁에 있게 하였다는 태자전력의 기사에 따라 생겨난 속전이라는 게 통설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금당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천무조(673∼686)의 건물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뿌리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 문화의 뿌리를 밝히는 작업이 지나친 국수주의나 자기 중심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금당벽화의 주인공이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은 높다. 당시 고구려계통의 화공 가운데 일본에서 활동한 황서(문)화사, 또는 자마려 같은 이가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황서는『나량 약사사불족기』에 있는 바와 같이 왕현책이 인도에서 탑 사하여 온 불족적을 당에 가서 다시 탑 사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야현묘에 따르면 황서가 입당하여 불족적 뿐 아니라 불화남본을 모 사하여 왔을 것이며 현 법륭사 금당벽화 역시 그러한 모 본을 밑그림으로 하여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벽화의 제작자는 담징이건 또는 황서 이건 간에 여전히 고구려 화 사의 작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금당벽화는 1949년 1월26일 뜻밖의 화재로 소 손 되고 말았다.
현재의 벽화는 소실된 벽화와 같은 크기로 찍어 둔 사진을 토대로 모사복원 된 것이다. 비록 예술적 가치가 상실되기는 했으나 본래의 실상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귀중한 자료다.
벽화는 대벽 4면, 소벽 8면, 합계 12면과 함께 여타 천정화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체로 이들은 여래상을 중심으로 협시보살과 천부 및 신장이며, 소 벽에는 보살상을 1구씩 배치하였다. 소 벽의 그림은 동서남북 4방에 사불 정토의 개념에 기초를 두고 약사·미타·석가·미륵정토로서 설명되기도 한다.
이들 정토를 상징하는 벽화들은 모두 장중하고 엄숙한 종교예술의 묘비를 자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서방의 아미타정토다. 아미타불을 주 존으로 하여 좌우에 관 음과 자지보살의 낯익은 자태는 영원의 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 벽화는 모두 의문에 짙은 음영 법을 적용하여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서방에서 전래된 화법의 영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방의 기법그대로는 아니다. 한반도에 들어와서 충분히 순화된 기법이 이곳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철선 묘의 한 형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금당벽화의 매혹적인 분위기로부터 벗어나 사중중보를 소장한 대보장전에 들어보니 무엇보다 백제 관음 앞에서 다시 한번 오묘한 예술적 감동에 심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불상은 바다를 건너간 같은 한인들의 솜씨이면서도 지리불사가 제작한 본존 석가삼존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불상이다. 즉「도리」가 제작한 석가삼존 상은 얼굴이 엄격한 표정인 반면 백제 관음은 보다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참조할 만한 회랑>
이 때문에 학자들은 석가삼존 상이 배위 계통의 불상양식임에 비하여 백제 관음은 남조의 양식이 적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 관 음은 직립 해 있으면서도 전체에 흐르는 유연한 선, 그리고 가는 몸매를 타고 내린 부드러운 천의의 처리, 어깨에까지 드리워진 보발의 사실적 표현, 불신 전체의 모델 링은 바로 당시의 여러 불상양식을 결집해 소 화한 백제양식의 완성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흔히 남조양식이란 것이 논의되고 있으나 아직 남조불상양식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못한 형편이다.
결국 이 백제 관 음은 구태여 국제적 양식변화에서의 산물로 보기는 어렵고 완숙된 백제양식으로 결론지어져야 한다. 이 불상은 양식 적 특징으로 보아 일본과도 판이하게 다른 순박하면서도 온화한 백제의 미를 여지없이 완성한 지보적 고대 불상조각이기 때문이다.
비록 백제의 문화예술은 나라의 패망과 함께 한국에서는 자취가 사라졌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 그 본색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남도의 대표적 사찰 법륭사는 나이를 자랑하는 목조건물과 함께 수백 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지닌 불교미술의 보고임과 동시에 우리문화의 원류가 이곳에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고대미술의 이해에 있어서는 이곳의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다. 국내에서의 부족한 자료는 국외에 현존하는「우리 것」을 통해 보완될 수 있다.
고증이 미심쩍은 경주불국사의 회랑은 우리의 고 건축인 이곳 법륭사의 회람을 참조하여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 복원된 불국사의 회람이 어쩐지 답답하기만 하고 도대체 만족스럽지 않은 느낌을 준 이유를 이곳 법 강사 회랑구조의 실측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