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외화부족 심각…암달러 시세 10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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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굿 프라이스』(좋은 값을 쳐 드릴 깨요),『메이 아이 ×유?』(놀고 갈래요?), 선명하게 인상 지워져서 앞으로도 결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 두 마디는 각각 소련과 미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취재기자에게 맨 처음 건네져 왔던 현지인의 말들이다.
하기야 어느 나라에서건 현지 인이 낯선 외국인에게 먼저 말을 걸게 되는 것은, 장사흥정의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하고많은 흥정 중에 하필이면 소련의「암달러 흥정」과 미국의 「사람 흥정」이 첫 번째 건네져 온 흥정이었다는 것은, 소위 초강대국이라는 두 나라의 깊은「그늘」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난생 처음 밟은 공산사회 당인 레닌그라드의 공항을 나서자 마 자 슬쩍 옆으로 다가선 것 은 털모자를 쓰고 점퍼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20대 초반쯤의 젊은이였다.

<1달러 7루블까지 흥정>
『굿 프라이스』로 시작된 잠깐동안의 달러 흥정은 먼저 1달러 당 5루불로 시작해서 순식간에 6루블, 7루블까지 올라갔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계속 고개를 가로젓는 낮선 동양인의 제스처를 값이 싸서 그러는 줄 알고 달러 당 7루블까지의 최고가를 불렀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계속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바로 돌아서서 눈이 흩뿌리는 어둠 속으로 뛰어 사라졌지만, 그 후에도 그와 같은 암달러상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호텔에서, 택시에서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중 가장 갈 사는 공화국이다.
수도 류블리아나의 중심 가는 밝고 개방적인 시민들의 발걸음과 벤츠·BMW 등의 외제차, 번화한 상점, 쿵쾅거리는 록음악 등으로 서구선진국의 대도시를 방불케 한다.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 류블리아나의 중심 가에 있는 번화한 상점들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자국화폐인 디나르로 물건을 살수 있는 상점이고 다른 하나는 서독 마르크·스위스 프랑·미 달러 등의 강세 통화만이 통하는 상점이다.

<남은 돈 달러로 못 바꿔>
이른바「강세통화상점」(Hard Currency Shop)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외국인 전용 면세점처럼 외국인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는 것아 아니라 내 외국인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다만 자국화폐는 안 받는다는 것이다.
유고의 은행들은 내국인에게는 물론 외국 여행자들에게도 달러를 디나르로는 바꿔 주어도 한번 바꾼 디나르를 다시 달러로는 바꿔 주지 않기 때문이다.
류블리아나의 어느 호텔에서 만난 한 외국인은 그의 시가에 불을 댕길 때마다 디나르를 돌돌 말아 불쏘시개로 쓰면서『이것은 종이』라며 웃곤 했다.
유고 경찰이 알았다면 그는 당장 잡혀갈 짓을 한 것인데 어쨌든 디나르로 살 것이 거의 없는 그에게는 불쏘시개로 쓰는 평이 훨씬 효용가치가 있다는 투였다.
묘한 우연의 일치였던 것은 동베를린을 들어갔다 나올 때『쓰다 남은 동독 마르크가 있으면 저기 우체통에 넣고 와라』라고 웃으며 가르쳐 주던 귀화한 서독 택시기사와「불쏘시개」의 주인공이 같은 국적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를 떠날 때 소피아 국제공항에서는 하마터면 출국금지를 당할 뻔 했다.
손에 든 짐까지 남김없이 무게를 단 끝에 공항직원은 71레바의 중량초과 화물 값을 매겼다.

<환전증명서 있어야 인정>
마침 21레바는 주머니에 있었기에 환전소에 가서 30달러를 내고 50레바 만을 바꿔 71레바 를 냈을 때였다.
『환전 증명서는-.』
『여기 있다.』
『…이건 50 레바 뿐이다.』
『21 레바는 갖고 있었다.』
공항직원의 표정과 어투가 갑자기 딱딱해졌다.
『외국인이 블랙 마킷에서 돈을 바꾼 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블랙 마킷이라니, 호텔 환전소에서 바꿔 쓰다가 남은 게 그거다.』
『흥, 누가 믿느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100분간이나 걸려 그 비좁고 복잡한 출국 장에 구부리고 앉아 가슴을 죄며 두개의 가방을 바닥까지 뒤진 끝에 간신히 호텔에서의 환전증명서를 찾아내 절로 치미는 신경질과 함께 던져 주고는 남은 수속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지만 어쨌든 출국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 어디서나 제시할 수 있도록 환전증명서를 지갑 등에 챙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쪽 잘못이었다.
그네들의 돈과 환전에 얽힌 경험담을 예로 들자면 얼마든지 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이야기 거리」가 아니라, 그 같이 엄격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실제로는 암거래가 성행하고 돈이 우체통에 넣어지고 하는 그네들의 경제구조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극심한「외화결핍」이다.
소련의 환전소에 공시되어 있는 공정환율은 ▲1백 달러가 61·86 루블 ▲1백 파운드가 1백9·43 루블 ▲1백 마르크가 33·51 루블 ▲1천 엔이 4·86 루불 ▲1백 스위스 프랑이 39·24 루블이었지만,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관광객들로부터 더 많은 강세 통화를 받아 내기 위한「바가지」지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당장 달러만 하더라도 암시세는 공정환율의 10배 안팎이었으니까.

<불가리아는 복수 환율제>
이에 비하면 불가리아의 환율제도는 훨씬 발전되어 있는 정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가리아의 공정환율은 3가지의 복수환율제였다.
예컨대 1달러가 ▲서방기업과의 공식환율에 의한 무역거래에서는 0·84 레바 ▲외국인이 신용카드를 썼을 때는 1·68 레바 ▲외국인이 현금을 바꿀 때는 2·52 레바다.
「체면」을 생각한 공식환율과 더 많은 외화를 필요로 하는「현실」을 잘 반영해 주는 환율제도인 것이다.
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극심한 외화결핍에 빠졌는지를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로서 한가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북방경제 교류확대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네들의 극심한 외화결핍이라는 것이다.
단적인 보기로, 요즘 소·동구국가들이 외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과실송금의 보장」을 저마다 내걸고 있지만 그네들 국가에서의 내수판매에 관한 한 그것은「공수표」와 같다.
아무리 많이 팔아 봐야 그 판매대금은 달러로 바꿀 수가 없고 결국「우체통」에 넣어야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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