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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너, 어디 있느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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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호 35면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마침내, 가을이 다 갔다. 한때 나무의 절정은 꽃이었다. 나무는 오로지 꽃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꽃을 다 쏟은 후에도 나무의 생애는 끝나지 않았다. 온몸의 초록을 밀어 올려 나무는 지구가 가장 뜨거워진 시간에 가장 뜨거운 생명의 팡파르를 대기 중에 뿌려댔다. 더운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은 지상의 모든 생명들을 얼래고 달랬다. 벌레와 뱀과 너구리와 두더지의 몸이 초록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커갔다. 그것은 가장 풍성한 생명의 잔치였다. 그때도 나무의 끝은 초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록은 그 자체 완전이고 완성이었으므로 나무의 서사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나무는 다시 온몸으로 자신을 불태웠다. 봄의 꽃들도 나무의 온몸을 그렇게 태우지는 못했다. 나무의 몸통을 감싸고 화염처럼 불타오르던 잎새들은 어느새 길바닥까지 일렁이는 불꽃들로 가득 채웠다.

나무는 이렇게 매 순간 자신을 다 쏟아낸다. 그리하여 지금 텅 빈 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무엇을 더 쏟아낼까. 무엇을 준비 중일까. 작은 계곡 건너 지난봄 이래 보이지 않던 집 몇 채가 나타난다. 초록 이불에 덮여 지붕밖에 보이지 않던 낡은 농가, 존재조차 없었던 키 작은 조립식 주택, 밤에만 먼 불빛으로 빛나던 통나무 별장이 발가벗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순식간에 초록 이불과 불덩이 같던 융단을 빼앗긴 세계가 부끄러움을 막 알기 시작한 아담처럼 서 있다. 갑자기 속내를 들킨 건 이쪽도 마찬가지여서 수많은 눈길 앞에 선 사람처럼 이쪽의 행동도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삶의 향기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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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너,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들은 꽃을 쏟아내고, 초록을 쏟아내고, 불덩이를 다 쏟아낸 다음에 지상의 모든 존재들을 발가벗긴다. 너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 앞에 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이제 들어가 숨을 꽃도, 이파리도, 뜨거운 불도 없다. 나무는 스스로 가난해짐으로써 세상의 만물들을 가난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다 끝낸 순간에도 나무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무의 속성은 지속이다. 영원한 ‘과정’만이 나무의 속성이다. 그때마다 나무는 온전히, 완전히, 자신의 끝까지 간다. 완전히 벗어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헐벗음으로써 나무는 자신을 완전성의 끝으로 내몬다. 이 절체절명의 끝판은 나무 아래 뭇 생명들을 사유(思惟)로 내몬다. 더 이상 구경할 것도, 들을 것도, 볼 것도 없을 때 주체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나무는 온전히 다 떨구어냄으로써 스스로 빈자(貧者)가 된다.

나무의 나신(裸身)은 존재의 거울이다. 나무는 자신의 벗은 몸으로 존재를 비춘다. 가난하고 누추한 영혼들이 나무의 텅 빈 거울에 비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죽음을 향해 있음을, 쏟아내고 쏟아내고 또 쏟아낸 다음에 쏟아낼 것은 오직 가난한 정신뿐임을, 나무는 자신을 무화시킴으로써 보여준다. 그리하여 존재의 영도(零度)에서 존재는 비로소 존재를 만난다.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존재는 더 이상 가난해질 수 없이 가난해진다. 가을이 쳐들어올 때부터 존재들이 쓸쓸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꽃 더미와 초록 구름과 불타는 몸이 모두 헛것이었음을 가을이 오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존재들은 꽃잎 뒤에, 초록 그림자 속에, 붉은 화염 속에 자신을 감출 수 있었다. 그것들은 마약처럼 황홀하고 졸음처럼 따뜻해서 존재들은 좀체 그것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무는 끝장까지 간다. 완전히 벗음으로서 나무는 마침내 존재들을 무위와 무사유의 고치에서 끄집어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무는 다시 결빙의 끝길로 들어갈 것이다. 거기에서, 온전히 죽은 자만이 비로소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온전한 답을 얻을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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