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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타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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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군사작전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이 입게 되는 우발적 피해를 영어식 완곡어법으로 '컬래터럴 대미지(collateral damage)'라고 한다. '부수적 피해'쯤 될까. 베트남 전쟁 때 처음 등장한 용어다.

오폭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군사시설인 줄 알고 폭격했는데 알고 보니 민간인 주거지였다던가, 적군을 향해 발사한 포탄이 민가에 떨어져 애꿎은 양민이 피해를 본 경우 등이다.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은 교전수칙을 위반한 전쟁범죄 행위가 된다. 고의성은 컬래터럴 대미지와 전쟁범죄를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이다.

그러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교전수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심지어 민간인을 '방패'로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탄에 동료가 쓰러지고, 적이 매설한 폭탄에 온몸이 찢기는 아수라장에서 이성과 윤리의 이름으로 자제심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전쟁의 숙명이다. 아무리 고상한 명분으로 치장한 전쟁도 그 이면에는 추악함이 감춰져 있다.

지난해 11월 이라크에서 발생한 '하디타 양민 학살 사건'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동료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어린아이와 부녀자 11명 등 민간인 24명을 살해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쟁범죄를 컬래터럴 대미지로 둔갑시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북서쪽으로 240㎞ 떨어진 하디타는 수니파 저항세력의 근거지 중 하나로, 미군에는 악몽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까지 이곳에서만 40여 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저항세력은 불에 탄 미군의 토막난 시신을 카메라에 담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가뜩이나 치를 떨고 있던 터에 도로에 매설된 사제폭탄이 터져 동료 한 명이 또 희생되자 미 해병대원들은 분별력을 잃었다. 주변의 모든 민간인이 저항세력의 협력자로 보였다. 해병대원 12명이 민가를 급습했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가슴에 총을 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66세의 할머니 등에 총질을 했다. 코란을 읽고 있던 77세의 노인은 휠체어에 앉은 채 총탄 세례를 받았다.

뒤늦게 미군 당국은 진상을 다시 조사하고, 이라크 주둔군에 대한 교전수칙 교육을 강화하는 등 재발 방지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다.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추악한 속성은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떼죽음을 당한 '밀라이 사건'을 낳았고, 한국전쟁에서는 '노근리 사건'을 낳았다. 생존자의 증언이나 언론의 추적보도를 통해 그나마 진상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가 그렇다는 것이지, 소리 없이 잊혀져 간 무고한 죽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전쟁은 외부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자위 수단이라고 전쟁론은 가르치고 있지만 그건 원론적 이상일 뿐이다. 국익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 전쟁이고, 일단 시작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과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모토는 투키디데스에서 마키아벨리, 토머스 홉스, 한스 모겐소, 헨리 키신저에 이르기까지 현실주의 전쟁론자들의 신념이었고, 그것이 역사를 지배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한계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모든 수단을 소진한 뒤 어쩔 수 없이 하는 마지막 선택이어야 한다. 하디타의 악몽이 떠오를 때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은 과연 정당한 전쟁이었는가'라는 번민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